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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군, 일본바이어 초청 해조류 수출 청신호완도군, 일본바이어 초청 해조류 수출 청신호 일본큐슈 지역에 해조국수와 전복수출 [청해진신문]전남 완도군은 지난 8일 완도 전복, 미역 등 수산물에 대한 대일본 수출판매를 위해 (주)이즈미 일본 바이어를 초청해 수출상담회를 개최했다. 이번 상담회는 지난해 말 일본 후쿠오카 총영사관 주최로 후쿠오카에서 열린 ‘한류식탁에의 초대’ 행사에 참가한 완도군 해외시장개척단의 현지 유통회사와의 협의사항으로 이루어졌다는 것. (주)이즈미는 일본 히로시마에 본사를 두고 식품슈퍼마켓과 대형쇼핑센터 등 89개의 점포를 둔 대형유통업체이다. 수출상담회에 참가한 일본바이어들은 해외수출 실적이 많은 (주)해청정을 방문하여 해조류로 만든 국수 생산공정과 완도전복주식회사, 해양바이오센터의 전복유통 현장을 둘러보고 회사 관계자와 적극적인 수출입 상담을 실시했다. 일본측 바이어는 해조국수와 전복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8월중 큐슈지역 시장에 상품을 선보일 계획으로 해조류 제품 수출에 청신호가 켜졌다. 군 관계자는 지역특산품에 대한 해외시장을 확대하기 위해 2014년도에 국제해조류박람회를 준비중에 있으며, 하반기에도 국외 바이어를 초청하여 수출상담회를 개최하는 등 기업체를 적극 지원해 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새감각 바른언론-청해진신문 / 한글인터넷 청해진신문.한국/ www.wandonews.kr/ www.wandonews.co.kr/ 입력2012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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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칼럼- 가나안농군학교와 김용기장로님을 다시 생각한다.청해진칼럼 가나안농군학교와 김용기장로님을 다시 생각한다. 도민편집장 서해식 한국기독교가 한국 현대사에 기여한 공이 대단함에도 작금의 교회와 크리스챤들의 부정적인측면이 많이 부각되어 위기감이 고조된 가운데 그리워지는 인물 새삼스럽게 조명해 보고싶은 가나안농군학교가 떠오른다. 새마을운동의 효시가 되었던 가나안농군학교의 복민운동은 진정성이 묻어나 잠든 신앙과 한국을 깨우는 시대정신이었다. 가나안농군학교와 김용기장로는 예수정신을 농촌에 접목하여 하면 된다는 적극적 신앙의 실천을 강조했다. 김용기장로 그분은 가고 없어도 그분이 남기신 정신은 살아있다. 일생을 통해 조국과 교회와 민족을 위해 피와 땀을 아낌없이 쏟으시고 바치신 장로! 그립습니다. 언행일치의 산 교육의 선봉에 서서 혼이 깃든 강훈련을 몸소 체험으로 보여주셨던 김장로였다. 김장로가 세운 가나안농군학교는 경기도 하남과 강원도 원주신림에 있다. 핵가족화로 가정이 해체되고 이혼율이 급증한 현실을 안타깝게 여기며 가족공동체 복원을 강조해온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서 많은 가정이 회복되기도 했다. 김장로는 청교도정신을 되살려 근검절약을 생활화하신 분이다. 10원을 비웃으면 10원에 운다. 비누는 반드시 비누케스에 넣어 물기를 빼고 사용하라. 치약은 칫솔 3칸정도 묻혀서 사용하라는 등 절약을 강조 하였다. 과소비가 미덕인 현대인들에게 비웃음을 살 정도로 절약을 강조했다는 것. 밥알 한톨이라도 버려서는 안된다며 식사예절을 누누이 설명하시던 그분이 왜 이리도 그리워 질까요. 고무신을 신고 양복 한번 입어 보지 않고 노타이 차림으로 일생을 보내셨던 장로님은 막사이상을 수상하러 필리핀에 갔을 때도 고무신신고 한복차림으로 시상식에 참석했던 일화는 지금도 인구에 회자되고 있다. 김용기장로의 자녀들도 아버지의 유지를 받들어 가나안농군학교를 꾸려가고 있다. 복받을 준비를 해야 복을 받게 된다며 복민운동을 제창하시고 일그러진 민족의 부정적 이미지를 불식하고 국민 개체 스스로부터 참된 자아상을 창출하여 정신개혁을 강조하시던 장로님은 "이렇게 살때가 아닌가"라는 저서를 국민독본으로 내놓아 관심을 모았다. 슬로건처럼 다가선 " 우리는 역사의 동상이 되자" 우리는 시대의 등불이 되자" "우리는 판단의 저울이 되자" 우리는 문화의 발판이되자" " 우리는 선악의 거울이 되자" 귓가에 생생하게 메아리쳐 온다. 권력과 부를 함께 거머쥐며 목적보다 수단이 정당화되고 수많은 지도층 인사들과 교계지도자들이 질시와 비난의 대상으로 전락해가는 시대상을 보면서 지도자와 지식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나안농군학교는 보여주고 있다고 본다. 우리가 지향하는 목표가 정확하지 못하면 혼란에 빠진다. 경제가 어렵고 고통분담의 요청이 거북스러워도 우리들의 삶의 공동체가 건강하기 위해서는 다시한번 가나안농군학교의 정신을 구현하여 이시대의 병폐를 치유하는 처방전이 되었으면 한다. 키는 작달막하면서도 옹골차기만 하셨던 김용기장로 참 대단한 거인이셨다. 새마을운동도 알고보면 박정희대통령이 가나안 농군학교를 방문하고 김용기장로의 멘토로 시작되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가나안농군학교 복민운동은 잘살기운동이었다는 증좌로 남아있다. 새감각 바른언론-청해진신문 www.wandonews.kr입력201112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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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수 설빈, 안중근의사 추모앨범 출반 화제가수 설빈, 안중근의사 추모앨범 출반 화제 순국 100주기 맞아 순교자 기리는 혼 불같은 노래로 가수 설빈, 안중근의사 추모앨범 출반 화제 태산을 붓 삼고 바닷물 을 먹물 삼아 조국을 향한 청년의 외침을 푸른 창공에 쓰고 싶다고 했던 안중근의 절규는 100년의 노래입니다. 안중근, 그는 더 이상 추모의 대상이 아닙니다. 안중근, 그는 실천의 대상입니다. [청해진신문] 안중근 의사 순국 100주기를 맞아 그를 추모하기위해 1909년 암울 했던 역사의 순교자를 기리는 혼 불같은 노래로 만들어 가슴으로 부르는 가수(설빈)가 있어 사회와 가요계에 화제가 되고 있다. 가수들은 무엇보다 국민들에게 더 많은 사랑과 인기를 누리고 성공을 하기 위해서는 히트곡을 선택하는데 사활을 걸고 있으며 수단과 모든 방법을 동원하여 투자하고 있다고 한다. 펜들의 인기와 부에 연연하지 않고 국가관 민족정신 이 실종되어버린 이 시대에 불굴의 청년적 투지와 실천적인 양심으로 노래를 보급 하고 있는 가수 설빈은 애국애족을 실천하는 가수이리라. 백년 전 역사의 현장에서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안중근의사의 넋을 추모하는 숭고한 애국심과 처절한 독립의 한을 가슴에 담아 전달하려는 그의 땀과 노력은 국민정신가요로 승하시키려는 가수의 몸부림이 잘 나타나 있다. 이 노래는 안중근평화재단청년아카데미 정광일 회장이 중국에서 안중근의사의 동상을 한국으로 모셔오는 중에 안 의사의 ‘대한독립만세’ 소리를 귓전에 듣는 듯 영감을 얻어 노랫말을 썼으며 작곡가 정동실씨가 참여 했다. 가수 설빈은 이 노래를 부를 때 마다 겸허한 마음으로 삭풍 휘감도는 만주벌판에 서서 조국을 향한 독립군의 한사람으로 안중근의 절규와 외침을 담아 이 시대의 젊은이들에게 양심으로 사명을 감당하려는 민족가수가 어느덧 되어가고 있다. 추모앨범은 타이틀곡 ‘대한국인 안중근’‘아! 조국이여’와 안중근 유언과 어머님 전상서, 분도 어머니에게 보내는 글 등을 나래이션 하여 애절한 시대의 한을 담아 재현하여 모든 이들을 눈시울을 뜨겁게 제작 되였다. (사)전국지역신문협회 전국250회원사는 이 뜻 있는 사업에 적극 동참하여 조국과 민족의 자긍심을 심어줄 수 있는 교육적 자료로 추천하고 각 지자체, 공공기관, 학교와 청소년들에게도 보급되고 들려줄 수 있다면 국가관확립의 기회가 될 것이라 기대하고 있다. <전지협공동취재> 새감각 바른언론-청해진신문 www.wandonews.kr입력 2011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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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한국교회 설교는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가?특별기고 - 정장복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실천신학 교수) 한국교회 설교는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가?설교사역의 위기요소 분석과 그 대안의 모색▲정장복 총장(한일장신대학교) ▲ 정 장 복 교수 -한일장신대 총장 서언: 백년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느꼈던 감격과 새로운 다짐들은 벌써 시들기 시작하여 그 함성과 발길을 찾기 힘들다. 교회의 갱신이 필연코 있어져야 한다는 젊은 결단들은 다 시들어져가고, 오히려 교회의 무기력이 이 땅위에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도덕성의 퇴보와 윤리의 실종현상은 이 민족의 25%를 점유하고 있다는 기독교의 무기력함이 얼마나 극심한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시대의 정신세계는 언제나 물질문명의 발전과 반비례한다. 과학의 기술과 경제적 발전이 거듭되는 세계일수록 그 땅의 엄격했던 도덕성과 정신적인 전통성은 퇴색되기 시작한다. 여기에 우리의 한국의 세계도 예외가 되지 못한 채 심각한 진통을 앓고 있다. 특별히 이 땅의 엄격한 유교의 윤리사상과 접목되어 활발하게 행군을 계속했던 우리의 기독교는 어느 시대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심한 딜렘마에 빠지기 시작한다. 이 땅의 교회의 구성원들도 평범한 시민으로서 삶의 향상과 현대의 문명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타당한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 설교자도 이 시대에 사는 인간이기에 문명의 이기(利器)를 십분 활용하면서 현대의 특권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상대적으로 시들어져 가는 설교사역의자의 고유한 정신(Ethos)과 사려 깊은 노력의 결핍이 문제이다. 즉 청교도의 신앙에 뿌리를 두고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던 소명의 다짐과 거기에 따르는 설교자의 철저한 생활에 너무나 심한 변화가 일고 있다는 문제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종으로서의 그 고결한 땀과 눈물이 서서히 식어져 가고 이 시대의 혼탁한 물결에 휩싸이지 아니하려는 몸부림이 사라져가는 현실이다. 그러기에 우리 설교의 단에 불이 꺼져가고 있다는 지적이 일기 시작한다. 그토록 좋은 음향장치를 했고 화려한 장식이 가득한데도 오늘의 설교가 무기력하다. 이 민족의 가슴에 그 유창한 설교가 스며들지 못한다. 설교자를 통하여 전달되어져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외면을 당하고 있다. 좀더 솔직한 표현을 한다면 오늘의 교인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예배당을 찾아갈 수밖에 없으나 오히려 설교 때문에 깊은 실망을 안고 돌아오는 경우가 적지 아니함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설교학계에서는 [설교의 위기]가 도래했다는 진단을 내리게 되고 적신호를 켜게된다. 세계의 어느 교회에서나 발생했던 이러한 설교의 적신호를 보면서 자기점검을 했던 설교자는 살고 그렇지 못한 설교자는 설교의 몰락과 임종이라는 비극의 종점에 이른다. 2. 성찰을 요구하는 시대적 변화 회고해보면 한국의 기독교는 이 민족이 고통의 눈물을 흘리던 시절에 들어와 한 세기를 넘긴 종교이다. 이 땅에 기독교가 상륙하기가 무섭게 바로 이어진 한일합방의 민족적 비극이 발생되었다. 그때부터 식민지 교회로서의 울부짖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터지기 시작했으며, 순교를 부르는 핍박의 마수(魔手)가 한국교회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리고 일제의 극심한 착취는 계속되어 이 땅의 가난은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비극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과 북으로 나누인 이 민족은 동족살상(同族殺傷)이라는 더욱 무서운 전쟁의 참화를 겪어야 했다. 이 무섭고 부끄러운 역사의 장이 끝나자 우리의 민족은 이 땅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갖은 노력을 기울였고 곧 등장한 군사정권과 함께 가난의 탈피를 가져오는데 함께 하였다. 그리고 터무니없이 등장하여 칼을 휘두른 정권이 인권을 짖밟을 때는 심각하게 저항하는 기록을 남기면서 [백담사의 귀향]이라는 희귀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사실 우리의 지난 한 세기는 한일 합방의 비극에서부터 80년대의 군사정치의 횡포에 이르기까지 숱한 변혁을 겪어야 했고, 때로는 잔혹한 삶에 시달려야 했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아픔의 역사는 어느 민족에게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러기에 우리의 교회는 어느 민족보다 강한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뜨겁게 주님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말씀에 깊은 뿌리를 둔 신앙의 불을 피우면서 그의 재림을 고대하였다. 한국교회의 한 사가(史家)는 이 때의 신앙적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의 특징은 , 철저하게 내세적이요 현실 부정적이면서도 가혹할 정도로 경험적이고 감각적인 생태에 접속하게 되어 있어서, 축복과 열복의 상징인 내세의 천국이 여기, 이 땅에서 그 종말의 아련한 대망의 자리에, 물리적으로 체험 가능하게 이르기를 줄기차게 갈망하는 데 있었다. 지난 한 세기를 돌이켜 보면 한국교회는 이상과 같은 연속된 불운의 늪에서 헤매이는 이 땅의 백성들에게 소중한 피난처이었고 도피성이었다. 그러기에 이 피난처에서 들려지는 말씀은 위로와 힘이 되었고 삶의 방향을 지배하는 막중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더군다나 그 말씀이 단순히 인간의 발상이나 지혜에 근본을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옷을 입었을 때 어느 누구도 감히 그 말씀을 향하여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오직 감사와 감격으로 일관하면서 눈물을 흘렀다. 그리고 거기에는 순종하는 길만을 걷기를 스스로 다짐하는 무리들로 행렬을 이었다. 자신의 건강에 이상이 와도 병원보다는 손쉽게 주의 종을 찾았고, 사업이 무너지는 아픔을 당하여도 예배당의 문전을 찾아 엎드려 기도를 드렸으며, 정치와 사회로부터 상처를 받아도 오직 말씀으로 위로 받기를 바라는 성도들로 예배당은 가득히 채워졌었다. 이러한 신앙으로 가득한 교회에서는 설교사역은 절대권위를 부여받게 되고 그 강단의 주역은 언제나 거룩한 권위와 반신적(半神的)인 존재로 군림을 한다. 그리고 메시지의 구성이나 전달에 별로 어려움을 겪지 않고서도 특유한 음성과 태도와 영성의 권위만을 가지고서도 우뚝 솟은 교회의 주인으로 등장하는 것이 교회사에 나타난 일반적인 현상이다. 바로 이때의 설교자는 쉽게 카리스마적인 존재로 등장하여 절대영향을 주는 위치를 쉽게 확보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설교의 준비를 위한 큰 부담 없이 자신의 경험이나 예화의 진열로 설교의 시간을 메꾸어도 아무도 그 설교자에게 도전장을 던지는 교인들은 없게된다. 이러한 교회의 양태를 가리켜 흔히들 혼돈과 수난의 교회라고 이름하며, 설교자에게는 이러한 교회의 강단이 오히려 안일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자신도 모른 사이에 계속적으로 그 세계에 머물고 싶어하는 타성을 갖게 된다. 그러나 21세기의 문전에 도달한 오늘 한국 교회는 달라진 시대의 철로 위를 달리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달라진 세대가 교회의 주역들이 되었고 그 주역들의 눈과 귀는 과거의 것이 아닌 전혀 새로운 시대의 것이다. 어둡고 지루하고 눈물로 얼룩진 불행한 어제의 사연들을 경험하기를 거부하는 그들이다. 그들은 높은 교육수준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려한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비록 상대적 빈곤을 느끼는 경우가 있어도 그들은 스스로를 극빈자로 말하기를 거부하면서 중산층의 세계에 머무는 자신이라고 말하고 또 그렇게 희망한다. 비록 달동네의 삶을 지속하는 현실이더라도 고임금을 손에 쥐면서 내일에의 희망은 언제나 밝게 꾸며간다. 어둡고 비겁한 정치가들을 과감히 바꾸는 주권을 이제는 행사하면서 절대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가지고 시(是)와 비(非)를 분별하는 능력을 행사하기 원한다. 뿐만 아니라 맹종의 신앙보다는 합리적인 신앙을 추구하기를 희망한다. 그들은 무식한 설교자보다는 지성적인 설교자를 원한다. 그들은 신선하고 창의적이며 역동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설교자 앞에서는 겸손히 고개를 숙이고 지루하고 아무런 변화도 없이 강단을 지키는 설교자에게는 경멸의 눈길을 보내는 모습을 서슴없이 나타내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눈길을 끌고 있는 것은 50년대와 60년대를 살아오던 세대마저 그토록 간절하게 지켰던 종말론적인 신앙들을 상실한 채, 먹고 살만한 오늘에 대한 애착이 대단히 깊은 상태이다. 이들의 신앙은 이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재림이 연기되기를 바라는 인간심성을 보이고 있다. 결국 이들도 과거 지향적이고 틀에 박힌 설교에 대한 환멸을 느끼면서 새로운 시대에 있어져야 할 신선한 설교자를 찾고 오늘의 수준을 이끄는 설교를 추구한다. 3. 한국강단을 침몰시키는 요소들 시대의 변천이나 개인의 발전이 어떤 단계에 이르든지 인간은 빵으로만 살수 없는 피조물임을 스스로 알고 한국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기 위해서 아직껏 교회를 찾고 있다. 특별히 하나님 신앙은 그 표현에 있어서의 문제는 있었으나 "기독교나 천도교만이 소유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가 공유한 아득한 옛부터의 신앙임"을 인정할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역은 이 땅의 종교문화로부터 거대한 위치를 차지고 있다. 이런 종교문화에 발판을 둔 한국 기독교인들의 특별한 심성은 신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에 대한 대단한 존경을 갖게 되고 주어진 메시지에 관하여는 최우선적인 경의를 표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기서 깊은 주의를 요하는 것은 첨단의 문화에 승선(乘船)한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선포된 메시지에 맹종적인 경청이나 추종을 하지 않고 나름대로의 판단을 거쳐 소화 내지 거부를 한다는 현실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목이 쉬도록 외친 오늘의 설교자 앞에 앉아 있는 성도들이 그 설교에 만족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현대 커뮤니케이션의 이론대로 전달한 메시지가 의도한데로 회중들에 의하여 공유(共有-Sharing)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설교자가 자신이 전한 메시지에 대한 메아리가 최소한 다음의 것들이기를 바라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수 가 없다. "목사님, 오늘의 설교는 저의 생애에 소중한 결단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목사님, 오늘의 설교에서 깊은 은혜와 감명을 받았습니다. " "목사님,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저의 고민하여 온 문제의 해답을 받았습니다." 아직도 이러한 주옥같은 반응을 받은 설교자들이 한국의 땅에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들의 교회가 성장을 거듭하면서 생명이 차고 넘치는 말씀으로 가득한 현장을 본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교회 강단에서 위와 같은 응답을 듣는다는 것은 설교자의 희망사항일 뿐 실질적으로 설교자의 귀에는 좀처럼 들리지 아니한 것들이다. 오히려 설교자의 가슴을 너무나 아프게 하는 다음과 같은 속삭임이 설교자의 귀에 훨씬 쉽게 들려온다. "오늘도 예화의 진열장으로 설교가 끝이 나고 말았군" "또 자신의 경험과 세상 이야기를 나열한 채 그 아까운 시간을 보내고 말군"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 자장가에 불과 하기에 나는 잘 수밖에 없었어" "이제는 지겹고 실증만을 불러일으키는 설교가 되어 더 이상의 인내는 힘이 들어" 여기서 우리의 설교자들은 깊은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무엇 때문에 오늘의 설교현장은 이렇게 슬픈 반응을 받게 되며 침몰되어가는 조각배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가? 분명코 까닭이 있다. 까닭이 있기에 문제가 발생되었다. 그 문제들은 지금껏 설교자를 반신적(半神的)인 존재로 절대화 시켜온 우리의 강토에서는 언제한번 시원스럽게 파해쳐보지를 못하였다. 유교의 유산으로 너무나 오랫동안 이 땅에서 지속해온 계층의식은 설교자의 모순과 이탈을 감히 지적하지 못하도록 하여왔다. 이것이 바로 수직문화의 비극이요 더 낳은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였다. 그 결과는 오늘의 설교를 위기의 상황으로 몰고온 독소들을 오히려 더 확산시키게 되었고 오늘의 설교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무엇이 우리의 성스러운 설교의 사역을 병들게 하는 요소들인가? 1). 설교 전문인을 위한 교육과정의 시급성 교육이란 천부적인 특수한 재능을 가진 자에게는 그것을 더욱 개발하여 빛나게 하는 것이며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후천적인 노력을 통하여 어느 한계에 도달하게 만드는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교육이란 모든 분야의 필수적인 것이며 초석이 되는 것이다. 특별히 특수분야의 경우는 그 교육은 훈련의 성격을 동반하면서 전문인으로서의 기능과 위치를 확보해주는 중요한 역활을 감당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사명자들은 누구나 함부로 감당할 수 없는 특수분야의 전문인들이라는데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는다. 이 말씀의 사자들은 인간사회가 지향하는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기 전에 신과의 깊은 연접(Link)과 그것을 지속하는 높은 영성(靈性)의 지속을 요구한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필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터득할 수 있는 기본 실력을 쌓아야 하고 그 말씀을 전달하는 방법과 기술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한다. 더욱이 설교를 듣는 회중들의 교육수준이 고도화 되어가는 오늘에 설교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설교의 이론과 실제 과정의 성실한 이수는 그 시급성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고 본다. 다음은 1925년 강도학(講道學)을 펴내는데 역자로 참여했던 고려위(高麗偉)는 오늘 우리가 반듯이 음미해야 중요한 부탁을 남긴바 있다. 福音은完全無缺한眞理이나其傳하난方法의巧拙이잇셔聽衆을感분激昻케하난 差等이不無하니講道의效果를獨히聖神의게만依하고其法을少許도學習하지 아니하니함은妄信이오愚見이라 2). 극도에 달한 "나"의 등장 전통적으로 설교사역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의 회중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운반하는'말씀의 사자'로 이해되어 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칼빈이 설교자를 하나님의 위탁을 받은 대사(Ambassador)로 이름하였다. 그리고 칼 발트도 설교를 정의 할때 "하나님이 선택한 설교자를 통하여 인간들에게 들려운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적인 설교자에 대한 견해는 오랫동안 기독교의 강단에서 지속해왔다. 그래서 설교는 언제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해석하고, 삶의 장에 적용해주어야 하는 당위성을 가지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맥을 이은 한국 교회에서도 처음부터 그렇게 가르쳐왔다. 한국의 신학교육의 초창기 부터 설교학을 가르쳤던 곽안련 교수는 "설교인은 청중에게 향하여 마치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아는 바를 너희에게 말하겠다.'와 같은 태도"는 절대 금물임을 강조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을 받은 평양신학교 출신 설교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설교의 교육을 실현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오늘의 설교자들은 전혀 다른 세계를 달리고 있다. 설교학 교육의 수준이 경험담을 들려주는데 끝난 시절의 피교육자들인 이들은 신언(神言)과 인언(人言)을 분간하지 못한 경지 속에서 설교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우리의 귀에 들려져야 할 설교문장은 예를 들면 분명히 다음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말의 뜻은 바로 이런 말씀입니다. 예를 들면 이러한 경우 (간단한 실례-예화)를 가르킨 말씀입니다" 또는, 우리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그 뜻은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러한 사례의 경우입니다." 이처럼 모든 설교의 문장의 주어는 성삼위(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으로 분명하게 구성되고 그 뜻을 밝혀주고 적용을 해주는 것이 설교의 본질이다. 이럴 때 만이 메시지의 주인이 뚜렷하고 설교자가 단순히 도구(Instrument)의 역을 감당함이 분명해진다. 이러한 신언의 부각은 주어를 중심하여 엮어진 인도 유럽말의 경우는 조금도 지장을 받지 않고 너무나 당연하게 지켜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는 술어중심의 언어로서 주어가 너무 많이 생략된다. 더욱이 일인칭 주어는 아예 생략하여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정감을 더해주기에 주어 없는 문장의 활용이 너무 보편화되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오늘의 설교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다음의 종결어(終結語)에서 너무나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그로 인한 설교의 탈선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충분히 입증을 해 주고 있다. '축원합니다.'' 믿습니다' '원합니다.''바랍니다' '생각합니다' '느낍니다' '기원합니다' 이상에서 본 종결어의 주어는 어떤 경우도 설교자 (나) 자신이다. 여기서 외국의 설교자와는 달리 한국의 설교자는 너무나 자신의 등장을 극심한 경지에까지 끌고 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결과는 설교내용이 설교자의 말과 경험과 지식과 그가 즐겨쓰는 예화로 완전히 채색된다. 그리고 회중들로부터 '아멘'만 유발시키면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된다는 착각에 빠지고 있다. 이러한 현장에서 너무나 뚜렷이 나타난 현상은 막상 전해져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자의 말에 가리워져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말씀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은 설교, 그것은 가장 심각한 설교의 위기를 몰고온 위급한 요소라 아니할 수 없다. 3) 한국의 설교자와 설교 횟수의 축소 개신교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에 촛점을 둔 종교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말씀으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 교회도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의 선포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신선한 내용과 타당한 논리를 수반하지 않고 시간을 메꾸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외쳐진다면 거기에는 새로운 문제가 등장하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인간에 의하여 동일한 메시지가 반복되어진다면 말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에게 막중한 부담을 안겨주게 되며 바라는 효과성은 지극히 제한을 받게된다. 우리의 한국교회의 설교자가 감당해야 하는 설교의 횟수와 그 양은 실로 지탱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 한 주간을 두고 보면 주일 낮설교를 비롯하여 주일밤, 수요일 밤, 그리고 매일의 새벽과 금요철야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설교자는 설교의 홍수 속에 휘말리고 있다. 최소한 주일 낮과 밤, 그리고 수요일밤 만을 계산해도 일년에 165회의 설교를 해야하고 10년이면 1560편의 설교를 해야 하는 실정이다. 과연 이런 짐을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인가? 한 설교자가 소유하고 있는 언어와 지식은 한계가 있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늘 신선하고 역동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 실로 부끄러움에 가까운 사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의 어느 교회를 가보아도 한국 교회처럼 설교만을 의존하는 예배가 이렇게 빈번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든 형편이다. 그리고 설교의 역사에 아무리 위대한 설교가라 하더라도 수 천편의 설교를 남겼다는 기록은 아직 읽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우리의 설교현장만은 이 엄청난 사역을 진행시키고 있는 참으로 기이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어쩔 수 없이 수 없는 반복을 거듭해야 하고 거기에 더하여 기계적인 습성, 그리고 만성적인 언어의 유희를 수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럴 때 교회의 강단은 생명력을 잃게 되고 설교는 몰락의 벼랑을 향하여 서서히 달려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기에 설교의 횟수를 줄이는 것이 설교자와 회중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길이라고 본다. 주일의 낮예배 만은 하나님과 인간에게 부끄러움 없는 반듯한 설교를 하도록 하고 주일밤과 수요일 밤의 기도회 등은 모두 성경강해 또는 계획된 성경공부를 비롯한 효과적인 프로그램을 개발 할 필요가 있다. 이럴 때 설교는 기다림 속에서 경청을 하게 되고 새롭고 신선한 말씀으로서 회중들의 심령에 심어 질 수 있다. 교회의 예배가 진정 목사의 설교에 성패를 건다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일이다. "기독교 신앙을 전하는 데 있어서 독보적 존재로서 우상화되어 왔던 설교는 이제 그 왕관을 벗을 필요가 있다"라고 설파한 베델(Theodore Wedel)의 말에 새삼스럽게 귀를 기울여 음미해 볼 필요를 느낄 시점에 와 있다고 본다. 4). 설교의 복제문제와 개발의 필연성설교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매일 받아먹었던 만나와 같은 것이다. 그때의 만나는 어제의 것을 오늘 다시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안식일을 제외한 모든 날들은 그 날 받아 그 날 먹어야 했던 가장 신선한 양식이었다. 생각하면 오늘의 설교도 언제나 신선한 만나와 같은 양식으로 회중들의 심령에 넣어 주어야 하는 것이 너무나 타당한 일이다. 그러기에 설교자는 한 주간 내내 말씀의 전달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몸부림을 치면서 메시지를 받고, 그 말씀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에 자신의 시간을 아낌없이 내놓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 말씀에 먼저 용해되는 감격을 경험하고 난 후에 회중들 앞에 서서 그 감격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하나의 이변이 발생하고 있다. 그것은 설교집의 출판이 당연한 경쟁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목적이 뚜렷하지를 아니하다. [나는 이렇게 설교를 했다]는 자랑인지 아니면 단순히 자신의 설교를 기록화 시켜 교인들에게 다시 읽히도록 하는 목적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러나 두 가지의 뜻하지 않은 부작용을 수반하는 경우를 본다. 하나는 동역자 된 설교자들이 그 설교문을 그대로 복사하여 강단에 들고나서는 부끄러운 죄를 유발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이 펴낸 설교를 교인들이 읽고 난 후 어느 때인가 [목사님은 지난번 했던 설교들을 다시 재탕하십니다] 하면서 새로운 실망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필자는 후자보다는 전자의 사건에 더욱 깊은 두려움을 가져본다. 자신이 먹이고 가꾸는 양들을 위하여서 목자는 더 좋은 꼴을 찾아 헤매이는 수고를 해야함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땀을 흘림이 없이 다른 목자가 이미 먹여버린 것을 울 넘어 가져다가 자신의 것인양 내양들을 먹여도 되는 것인지를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런 행위가 습관화되는 날 찾아오는 결과는 참으로 비참한 것들이다. 그것은 자신의 설교능력이 급격히 저하되어 그 회복이 너무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는 사실이며, 또 하나는 회중들이 다른 곳에서 듣거나 동일한 설교집을 읽은 경우 조금의 동정도 없이 경멸의 시선을 자신에게 보내게 된다는 사실에 깊이 유의해야 한다. 현대를 달리는 설교자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교회마다 그들의 환경과 수준과 신앙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만을 위하여 필요한 양식이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결코 남의 설교를 복사하여 그대로 먹일 수 없는 자신들의 양들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삯군된 목자는 그 이마에서 땀 흘리기를 거부하고 쉽고 편한 곁길을 즐겨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참 목자는 눈물과 땀을 때로는 피까지 흘리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양들의 먹이를 찾아 먹인다. 홍수처럼 쏟아진 설교집이 오늘의 설교사역에 에덴동산의 과일처럼 등장이 되고 설교자들에게는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 되고 있다. 특별히 자신이 설교를 하려는 본문과 주제를 결정한 후에 설교자의 손이 서서히 남의 설교집을 만지고 그 눈길이 거기에 머물려는 유혹은 참으로 곤혹스러운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참된 설교자는 거기서 과감한 결단을 내리면서 야곱처럼 자신의 환도뼈가 상하더라도 하나님을 붙들고 내 양들이 살찔 수 있는 양식을 달라고 매어달리면서 펜을 잡고 자신의 설교원고에 받아쓰는 과정을 밟아야 할 것이다. 본훼퍼가 조국에 돌아가 히틀러의 칼날을 피하여 지하의 신학교에서 설교학 교수로서 열강을 토하면서 남긴 말이 새삼스럽게 한국의 설교자들을 향하여 들려지고 있다. "설교는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그 자신이다....말씀으로서 회중들 가운데를 걷고 있는 그리스도 그 자신이다." 그렇다 설교자는 오늘 자신의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와 땀흘린 준비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나에게 맡겨진 회중들에게 오셔서 그 가운데 걷도록 해드리는 것이 오늘 한국의 강단을 지키는 설교자의 진정한 사명이다. 5). 설교자의 땀과 피로 적시는 설교[목회의 장(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목회자들에게 던질 때 응답자의 70%가 설교라고 대답을 한다. 이러한 응답은 설교자들의 생활 속에서 그대로 반영이 된다. 그들은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설교에 대한 부담을 앉고 살아가는 현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설교자들이 막상 설교준비를 위하여서 내놓은 시간은 30%도 되지 않은 다는데 그 심각성이 내재하고 있다. 설교가 목회의 장에서 70%의 비중을 차지한다면 자신의 시간도 그 정도를 할애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모순을 안고 있다. 설교자는 성령의 손에 잡힌 도구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설교가 수록되어진 녹음기와 같은 단순도구가 아니다. 설교사역은 언제나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전달하는 일이다. 그러기에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하여서는 자나깨나 명령을 기다리고 생각하고 자료를 찾아 헤매이는 것이 생활의 전부가 되어야 한다. 사실 설교의 준비는 끝없는 정성과 준비가 요구되어진 특수한 사역이다. 이런 까닭에 설교자는 남달리 건강한 영성를 가꾸어 영적으로 건강한 호흡을 하는 존재여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터득할 수 있는 지적인 바탕과 성장을 쉬지 아니해야 할 존재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브라이트 신학교 설교학 교수였던 베켈히머(H. Beckelhymer)의 말을 되새겨 본다. 성공적인 설교란 쉬운 것이 아니다. 설교를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공적인 설교가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설교란 한 인간의 신앙과 정성어린 마음과 언어의 기술과 그리고 지적인 모든 바탕의 최고점을 요구하는 중요한 일이다. 이러한 설교자는 25분의 설교를 위하여 최소한 25시간을 쏟을 수 있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즉 매일의 오전 4시간은 설교준비를 위하여 바치는 설교자여야 한다는 결론이다. 그리고 삶의 장에서 주어진 말씀을 적용할 수 있는 정황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 할 수 있는 예지의 감각이 추구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은 심방을 비롯하여 각종행사와 기타의 일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쏟아버리고 피곤한 주말에 설교를 준비한다고 앉아있게 된다. 이러한 설교자에게 시선한 만나가 주어지고 그 말씀의 깊은 의미를 터득 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는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피곤과 졸음의 산실(産室)에서 과연 생명을 깨우치는 설교가 이룩될 수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6). 성언이 없는 설교의 범람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은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기록되어진 말씀이 설교자에 의하여 현장의 언어로 선포되어지지 않고 해석되어지지 않은데 기인한다. 설교는 설교자의 사상이나 경험이나 유명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종교수필 또는 교양강좌가 아니기에 언제나 기본적으로 봉독되어진 성경의 말씀을 선포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설교자의 정도(正道)임은 수차에 강조해온 사실이다. 그러기에 진정한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현장에 얼마나 많은 회중들이 모여 열광적으로 '아멘'을 연발하는가에 눈을 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충실히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그들에게 들려주었는지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의 강단에서는 참으로 부끄러운 설교자의 연출이 속출하고 있다. 즉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인 본문의 봉사자가 아니라 지배자로서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설교자가 자신의 생각과 사상,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흥미진진한 예화를 나열한 후에 하나님의 말씀인 본문을 들려주는 현상이 너무나 빈번하게 발견되어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지식과 분석, 또는 경험을 실은 이야기하고 난 다음에 그 경험담에 좀더 튼튼한 신빙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설교가 시작되기 전에 봉독한 본문을 인용하여 본문은 설교자를 위한 하나의 징검다리 역할 이상을 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설교의 현실을 우리의 한국교회에서는 너무 자주 보게된다. 이러한 선상에서 오늘도 설교사역을 감다하고 있는 설교자는 다음의 말에 깊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메시지의 재원이 시대적인 사건, 문학, 철학, 정치 이데올로기 등이 될 수는 결코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설교자 자신의 경험과 감정까지도 설교의 원천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직 설교의 메시지는 성경에다만 그 원천을 두어야 한다. 여기서 한국의 강단이 인식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은 설교는 단순한 신앙간증과는 너무나 다른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는 문제이다. 신앙간증은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자신의 경험과 판단에 기준을 두기 때문에 회중들로부터 공감대만 형성하면 된다는 지극히 한정된 제약을 받는다. 그러나 설교는 그 기준이 그 날의 설교본문에 있다. 그 본문은 설교자와 회중 모두에 의하여 함께 읽혀진다. 거기서 회중들은 그 말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소유한 상태에서 설교자가 그 말씀을 어떻게 선포하고 해석하고 자신들의 삶의 장에 적용시켜주는지를 주시하게된다. 그러기에 설교는 수많은 회중의 감시를 받으면서 본문이 말씀한 범위를 벗어나서는 아니되는 엄격한 제한을 받고 있다. 결과적으로 설교자는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그 말씀을 듣기 위하여 설교자의 앞에 앉아 있는 무리들로부터 우선적으로 봉독되어진 말씀의 지배자가 아닌 봉사자가 될 것을 철처히 요구를 받게된다. 7). 물량주의와 기복사상을 심는 설교의 실상 설교는 시대상황에 따라 메시지의 방향이 어느 한편에 치중될 수 있고 또 그러하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시대의 형편이 어떤 위치에 있던지 그 메시지는 하나님을 중심하여 그 나라와 의를 확장해 나가는데 그 기본적인 목적을 두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메시지의 바른 형태이며 지난 수 천년 동안 설교사역의 주역들은 이 괘도를 지키기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그런데 우리의 한국 강단은 이 땅의 종교문화에 너무 극심하게 편승을 하고 있다. 즉 가난을 탈피하고 한을 풀어 풍족한 복을 누리려는 절박한 욕구를 종교에서 채우려는 신앙심을 그대로 수용하는 메시지가 범람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들의 영과 육과 범사가 잘되어 복을 담아야 할 그들의 창고가 차고 넘치는 길을 알려주는데 주안점을 둔 설교가 너무나 보편화되어 있다. 거기서 다시 한번 한국의 강단이 흔들리고 침몰의 위기를 맞는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결과는 회중의 가슴을 울리고 반성과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적 설교의 현장에는 교인들이 모이지를 아니하고 [축복의 성회],[신유의 성회], [은사의 성회]라는 현수막이 있는 곳에 한국 성도들의 발길이 무수히 몰리게된다. 바로 이런 사연들이 오늘의 설교사역을 어둡게 만들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회중들의 기복위주의 취향에 따라주지 않은 설교자는 외면 당하고 떠나주기를 바라는 지극히 이기주의적인 성도를 양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바로 이것이 기복사상과 물량주의에 촛점을 두고 목이 쉬도록 외쳐온 설교가들이 맞는 자업자득의 현상이다. 8).설교의 내용과 설교자의 삶에 대한 괘리현상필자가 한국교회의 평신도를 대상으로 하여 연구 조사한바 있는 [설교사역자에 대한 평신도의 의식구조 분석]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바있다. "귀하가 아는 설교자들에 대하여 생각할 때 그들의 설교와 삶의 연관성이 어떠하다고 보십니까?" 여기에 대한 응답자의 80.2%가 "완전치는 못하지만 설교대로 살려고 노력한다."고 응답을 하였고 10.3%는 "설교자는 설교하는 대로 생활한다."라고 대답한 바 있다. 이러한 응답의 비율은 서구교회에 비교하여 월등하게 높은 비율이다. 이것은 바로 이 땅이 유교문화의 영향권에서 오랫동안 정착해온 결과로서 도덕성의 강조와 선비의 고결한 인격성에 대한 높은 기대가 그대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본다. 문제는 오늘의 설교자들이 가장 고결한 성직인 목사로서 자신이 전달한 메시지를 먼저 실천하는 본을 보이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설교자의 대답이다. 여기에 대한 솔직한 대답은 최근에 들어와 대단히 부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사회에서 실종의 위기에 직면한 윤리와 도덕성이 설교사역자들의 삶과 인격에 의하여 살아나지 못한 채 오히려 심각한 탈선이 여기저기서 발생되고 있다. 성전에서의 살인사건, 밀수에 가담한 목사들의 이름, 그리고 외화낭비에 선두주자로서의 목사의 생활, 외국신학교의 분교를 설치하고 박사학위를 남발하는 주범들로서 신문에 그 이름이 오르내리는 현상은 오늘의 설교사역을 가장 멍들게 하는 치욕적인 보도들이다. 설교자가 이 땅에서 풍겨오던 고유한 상은 남다른 것이었다.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헌신적이고 검소한 생활의 주인이었으며 풍기는 인격에 있어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고결한 품성과 지식을 소유한 것이 한국의 설교자 상(像)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목사는 물질의 풍요를 앞서서 누리는 상류사회의 생활인들로 변화되고 때로는 극소수의 설교자들에 의하여 자신이 외친 메시지와 자신의 삶과 인격과는 무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펼치면서 이 땅의 설교사역을 어둡게 하고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이 "생활하는 집과 말씀의 집"을 따로 지을 때 설교사역에 찾아드는 슬픈 비극적 결과는 실로 엄청날 것이라는데 유의해야 할 것이다. 9). 목회의 수단과 방편이 될 수 없는 설교설교란 기본적으로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설교자 개인의 불편한 심기를 표현하거나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편이 될 수 없다. 설교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발산하는 무대가 될 수 없고 회중을 선동하여 자신의 개인적인 집단으로 만들 수 없다. 그런데 현대의 소수의 설교자들에 의하여 설교의 본래적인 성격이 퇴색되기 시작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지식과 연구의 결핍을 회중들로 보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서 신비주의를 도입하는 사례를 본다. 방언과 예언의 신비한 현상을 유도하여 그것이 말씀 위에 군림하도록 하는 실수를 범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직접적인 지적을 하면서 때로는 위협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권위를 절대화하여 심지어는 저주를 행하는 모습을 본다. 이럴 때는 마치 설교자가 하나님으로 둔갑한 모습을 자행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햐 하는 강단은 헌금을 수집하는 무대로 변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설교가 목회자의 뜻을 펼치는 수단의 방편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때 우리의 목회자들의 사회에서는 부끄러운 이야기들이 오고갔었다. 부흥집회를 위하여 강사를 모실 때 특유한 방법으로 헌금을 많이 하게 하는 강사를 초빙을 하면서 수입을 어떻게 분배한다는 약속을 했어야 하는 시절도 있었다. 생각하면 얼마나 한국교회의 강단이 철저하게 탈선하고 있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설교가 목회적 수단으로 이용되는 효과적인 이기(利器)로 전락된다면 거기에는 밝은 내일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어둡고 침울한 장래만이 있을 뿐이다. 언제나 설교는 "은혜의 효율적인 방편으로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이지 결코 인간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또는 설교자의 정신적 피곤을 풀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진정한 설교는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시고 다시 살리신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생명의 선물을 전하는 것"이다. 10). 설교자의 착각적 과신(過信)의 문제인간이란 자신이 행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일은 일의 진전에 절대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일정한 일을 수년을 넘게 계속하면 스스로 진전 시킬수 있는 요령과 기술이 터득되면서 전문인의 세계를 달리게 된다. 그럴 때 누구의 추종도 불허하는 자신의 고유한 영역의 성을 쌓게 된다. 설교사역 역시 이상과 같은 이론을 도입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어느 설교자나 자신의 강단에 설 때 자신이 넘치는 모습을 보이고 유창한 설교를 펼쳐나간다. 그 몸가짐에서 그리고 슬슬 쏟아져 나오는 달변에서 회중은 설교자의 전문성과 그 성스러운 직책에 대한 인정을 한다. 그리고 아멘을 연발하면서 그 설교에 심취되는 경우를 본다. 이런 현상 앞에서 어떤 설교가도 자신의 부족에 대한 인정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설교자의 설교를 비데오에 담아 설교자 자신이 보도록 할 때마다 거의 모든 설교자가 반응하는 다음의 말은 우리가 깊이 음미해 볼 만하다. "저게 나의 설교인가요? 저 정도의 수준에 불과하던가요? 실망인데요." 이 반응의 응답은 바로 자신의 설교가 자신이 생각했던 수준에 미달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 필자가 십 수년이 넘도록 경험해온 설교학 교실에서의 실태는 아무도 자신의 설교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우월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설교자가 없었다. 환언하면 거의 모든 설교자가 착각적 과신의 늪에 빠져서 설교사역을 진행하고 있다는 결론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자신에게 설교향상을 위한 겸허한 노력이 얼마나 시급한지를 모른 채 이어지는 설교를 메꾸면서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른 사이에 어느덧 자신감이 형성하게 되고 드높은 권위의 의자에 앉아 교주적(敎主的) 자세를 취하게 된다는 슬픈 그림을 그리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자연적으로 스스로를 성공적인 설교자라고 자부하게 되는 교만의 자리를 향하게 된다. 평생을 설교학 교수로 살았던 일리온 죤스(Ilion Jones)는 조각가 도발드슨 (Thorvaldsen)의 말을 연상하면서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에 만족할 때 그는 스스로 내리막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라고 갈파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설교자가 자신은 초보단계를 벗어난 완벽한 설교자라고 자랑할 수 있는 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완벽한 설교를 추구하는 설교자는 있으나 완벽한 설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설교학에서 반복하여 가르치는 말이다. 그런데도 자신의 설교가 최상의 단계에 이른 것 마냥 믿고 더 이상의 발전을 추구하지 않은 착각적 과신의 주인들이 우리의 한국교회에 강단에 너무 많이 서 있음을 볼 때 한국교회의 미래가 지극히 염려되지 않을 수 없다. 진정 설교의 자만과 교만에 빠져 있는 설교자에게는 성령의 도움이 떠나고 다음의 말씀만 그 귀에 들려줄 것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맺는말: 1960년대 후반에 클라이드 리드(Clyde Reid)에 의하여 설교의 위기 (Empty Pulpit)라는 적은 책이 출판되자 미국의 교회를 비롯하여 수많은 설교자들은 심한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리드는 이 책자를 통하여 지금까지 안일하게 설교의 사역을 감당해 오던 설교자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대담하면서도 솔직한 도전장을 던진 바 있었다. 여기에서 강단이 비어 있다는 말 (empty pulpit)은 목사가 없는 교회 강단을 의미한 말이 아니다. 오히려 목사가 강단을 지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좌석에 앉아 있는 교인들이 말 할 수 없이 허전해 하고, 전혀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며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심각한 곤경에 부딪쳐 있는 오늘의 강단을 의미한다.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에 미국의 강단을 향하여 있었던 이러한 예리한 지적이 전혀 생소하게 들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 우리의 한국교회 강단을 향하여 직선적으로 들려주는 고마운 지적으로 받아드리고 싶은 충동을 더욱 절실히 느낀다. 그 이유는 위에서 지적한 부끄러운 사연들이 오늘 우리 한국의 강단에서 벌써부터 발생하고 있었으며 지금은 오히려 더 심각한 경지에 이르러 '설교의 몰락' 또는 '설교의 임종'이라는 슬픈 비판들이 등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의 한국교회 설교사역은 아직도 건제(健在)한 면이 없지 아니하다. 선진국의 교회에서 볼 수 없는 설교자의 뜨거운 기도가 있고 생사를 걸고 뛰는 목회의 열심이 있는 한국교회이다. 그리고 아직도 순교의 피가 우리의 바닥을 흐르고 선교의 뜨거운 열기가 쉬지 않은 우리의 교회이다. 어떤 땅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심취성이 강한 우리의 성도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아직도 앞에서 열거한 설교의 위기요소에 물들지 않은 맑고 귀한 설교자들이 우리의 한국교회를 지탱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는 세계의 교회역사에 특유한 교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얼마동안 왕성했다가 시들어지는 기록을 역사에 남긴 채 그 명맥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서구교회의 후예가 되기를 거부한다. 세상 끝날까지 부흥만을 지속하는 교회가 되겠다는 이 소박한 소망의 실현을 위하여 이 땅의 목회자들은 자신이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치면서 땀과 눈물을 오늘도 쏟고 있다. 그러나 국민소득의 향상에 기인한 물질만능의 시대적 부산물이 우리 속에 이미 침투해 왔으며 성직의 탈선적 조짐이 심각하리 만큼 대두되기 시작한다. 이때에 설교는 살아있는 불씨의 역을 감당해야 하는데 함께 탈선을 한다면 이 땅의 교회는 소망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한국강단의 설교가 침몰되기 전에 최소한 이상과 같은 시급한 요소들에 대하여 엄격한 자기진단과 성찰이 있어져야 한다. 그리고 나타난 위기현상들에 대한 시급한 대책이 마련되어져야 할 것이다. 한편, 정장복 총장(한일장신대학교)은 청해진 완도출신이며 고향마을 청산교회의 종지기 소년이었던 그는 신축 건축헌금으로 거액을 헌금하시고 청산교회 건축설계를 건국대교수(경남 외도 건축물 설계자)에게 부탁하여 무료로 설계까지 지원했다.<石泉김용환 발행인, 대표기자>새감각 바른언론-청해진농수산신문 www.chjnews.kr 입력0201002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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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진칼럼-완도군 청년은 군민의 희망이 돼라.청해진칼럼. 완도군 청년은 군민의 희망이 돼라. 도민편집장 서해식 ▲ 서해식 도민편집장 완도군청년회는 지난 1981년 7월1일에 준공을 본 군내리 822-58번지에 3층의 자체건물을 마련하여 지방자치출범과 함께 주목을 받는 청년운동으로 자리 매김하여 25대 황경인 회장 재임시에 가용리 수고앞으로 새 건물을 신축해 전국에서 찾아볼 수 없는 명실상부한 청년회관을 보유하게 되었다. 지난 2003년11월8일에 준공을 본 4층의 현대식 건물로 웅비한 청년들의 기상에 걸맞게 그위용을 드러냈다. 김대중 대통령시절에 행자부차관에 발탁된 조영택님의 예산지원으로 국비가 투입되었다. 지난1월14일에 32대 이인주회장이 취임하였는데 이 회장은 완도투데이 발행인과 전광일보 기자로 매서운 필치로 필명이 널리 알려진 언론인이다. 매년 1월이면 완도군 12개읍면에는 청년회장단 이취임식 행사가 연례행사로 자리 잡았다. 지난 일제 암흑기에 완도군에서는 소안배달청년회가 항일운동의 선봉에서 독립운동을 했던 역사를 기억한다. 완도군 청년회도 투철한 정의감과 애향심으로 우리고장 완도를 위해 봉사와 희생정신을 발휘해온 그동안의 활동에 대해 치하를 보내고 싶다. 1200년전 완도에 청해진을 설치하고 서해바다를 평정했던 장보고 대사의 호연지기를 배우고 1896년에 완도군을 설군했던 문정공 이도재 관찰사의 정신을 이어받아야한다. 문정공은 고금도에서 9년동안 유배생활을 하면서 서당을 열고 제자들을 많이 길러내고 그제자들이 나중에 항일투사가 되기도 했다. 세계적인 청년운동인 YMCA는 우리나라에서는 조국근대화와 민주화에 기여한바 크고 도산안창호가 세운 흥사단도 민족정신고취에 기여한바있다. 국제조직인 청년회의소도 청년 리더십 향상에 노력한 점이 돋보인다. 완도군12개 읍면 청년회도 지역의 축제를 주관하며 추석이나 설날 때면 귀성객 편의 제공에 진땀을 흘리고 있다. 완도군청년회는 섬마을 학생들 도시나들이에 한몫을 거두고 출향 향우들을 초청하여 고향명소를 소개하여 칭송이 자자하다. 완도군 청년들에게 무한한 가능성이 열려있다. 초고령화로 치닫고 있는 완도군 현실을 타파해 갈 수 있는 해양 개척정신을 발휘할 때다. 전복은 전국생산 80%를 차지하고 고부가가치를 창출해내는 소득산업이다. 다시마, 해조류, 톳 양식도 전망이 좋아 청년들이 완도에 정착하여 삶의 질 향상에 승부를 걸만하다. 청년들이여 완도를 정의와 신뢰가 살아 숨쉬는 고장으로 만들어 나가 길 바란다. 오는 6월 지방선거를 맞이해 상대후보를 죽이는 흑색비방과 아니면 말고식의 유언비어 양산은 깨끗한 선거풍토 조성을 위해 청산해야 할 나쁜 짓이기에 청년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는 말이 있다. 정의를 위해 행동하는 양심이 되어야 한다.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인격이 바뀌고, 인격이 바뀌면 운명이 바뀐다했다. 청년들도 의식이 확 바뀌어 완도 군민의 희망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새감각 바른언론-완도주간신문 청해진 www.wandonews.kr/ 입력:100126-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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石泉칼럼-이 시대는 의인(義人)을 찾고있다.石泉칼럼 이 시대는 의인(義人)을 찾고있다. 완도주간신문-제401호 청해진 1면이 백지보도를 한 사연? 金 容 煥(사단법인 전국지역신문협회중앙회 교육담당 부회장, 발행인) ▲ 石 泉- 金 容 煥 조국의 위기를 막아낼 인물을 찾는다라고 외쳤던 그리스의철인 디오게네스가 생각나는 시대를 우리는 살고있다. 역사를 바로세우기 위해서는 의로운 사람이 있어야한다. 역사는 빛과 소금이 되는 의인 때문에 유지되고 바로 세워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한다. 양심을 회개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마음이다. 부패하고 타락한 정치가 우리 모두의 잘못 때문이요. 경제와 정치의 윤리가 문란하고 사회가 부패한 것에 언론들의 비판과 견제, 대안제시에 무관심이 있다면 반성해야 할 것이다. 이 시대는 의인(義人)을 찾고있다. 사회의 기강을 바로 세우려면 언론이 비판과 견제와 함께 대안제시에 충실해야 한다. 지난2002년10월11일 서울 한국언론회관에서 열린 한국신문협회 창립40돌 기념식에서 고,김대중 대통령님은 신문구실의 첫째는 공정한 보도와 논평을 통해 독자들에게 바른 판단의 근거를 제시해야 하는 것이라며 잘못된 보도가 국민들에게 얼마나 혼란을 주는 지 자각하고 역사적인 관점을 가져야 한다고 말씀했다. 2009년 12월 마지막주에 내보낸 완도주간신문-제401호 청해진 1면이 백지보도를 한 사연?에 대하여 이 기상천외한 백지신문을 놀라움과 함께 그 의도와 뜻을 두고 갖가지 화제를 불렀다. 전국각지의 언론인과 사단법인 전국지역신문협회 회원사와 독자, 그리고 전국의 완도향우들도 그 이유가 궁금해 전화로 문의를 해왔다. 본지 제401호 1면 광고를 제외 한 기사지면을 백지로 비웠던 사연은 백지는 언어나 활자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일 수 있다. 지난 1974년에 광고란을 백지로 내보낸 동아일보는 군사정권의 기업광고탄압에 대한 메시지이며 지난 새천년 원년인 2000년1월1일자에 한국일보가 기사지면 1면을 백지로 내보내 한국편집기자협회의 2000년도 한국편집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 이후 창간 10년만에 전국지역신문 최초로 완도주간신문-제401호 청해진 1면이 백지보도는 힘있는 권력기관의 견제와 함께 비판기능, 또한 문제의 대안제시에 충실하고자 함이다. 본지를 상대로 완도군의회 일부 몇명의 군의원이 공인으로 겸허한 초심을 잃고 해서는 안될 검찰 및 경찰에 악의적인 진정, 고소를 본지를 상대로 하고 진정서를 본 사실도 도장도 찍은 사실이 없다는 인터뷰를 완도투데이신문에 보도된 내용이다. 중앙언론과 TV에 보도된 내용을 지역신문에서 확인한 비판기사를 수사해 공소제기한 힘있는 권력기관으로 부터 공권력피해자인 언론으로 본지1면 지면의 백지보도는 그 어떤 언어보다 활자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 일 수 있기 때문이다. 신문편집은 단순한 판짜기가 아니고 긋고 또 긋는 선을 통해 신문의 생각, 해석방향이 정리되고 지면의 미학이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공권력피해자를 줄이기 위해서도 이 시대는 의인(義人)을 찾고 있다. <石泉은 초당대 학사-사회복지사, 성화대 관광전문학사, 가정폭력 및 성폭력 상담사, 법무부범죄예방전문위원 수료, 전남대 경영대학원 수료, 은행부기2급, 주산3단, 시인, 사진작가> 새감각 바른언론-완도주간신문 청해진www.wandonews.kr입력:201001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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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록 국회의원(민주, 해남,완도,진도) 인터뷰 -특집청해진신문 창간 9주년 특집-김영록 국회의원 인터뷰 김영록 국회의원(민주, 해남,완도,진도) 인터뷰 예산결산특별위원으로 내년도 예산에서도 지역발전과 소득사업에 보다 더 노력하고 매진하겠다. ▲ 김영록 국회의원 본지 창간9주년을 맞이해 특집 인터뷰로 민주당 김영록 국회의원(해남,완도진도)을 만나 보기로 하였다. 최근 김영록 의원의 바쁜 국정 일정관계로 인해 지난 9월3일 서면 인터뷰로 대체했다. 지난 2009년 1월11일 민주당 완도사무국에서 가진 신년하례식에서 포용하는 정치, 함께 가는 정치를 하겠다는 김영록 국회의원은 수산인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으로서 수산관련 이해관계자 의견수렴 및 반영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밝혔다.<石泉> ▶Q1. 완도지역 현안문제 해결을 위한 2009년도 예산확보내역은? A. 미국발 서브프라임 경제위기로 촉발된 세계경제 위기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지자체와 가정경제까지 파급되어 있습니다. 다행히도 올해 하반기부터는 조금씩 회복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고 있으나 2~3년간은 낙관할 수 없는 실정이기도 합니다. 완도군의 경제여건은 여타지역보다도 훨씬 어려운 여건에 놓여있습니다. 지자체 경제지표로 여기는 재정자립도를 볼 경우, 완도군은 2008년 6.4%, 2009년 7.2%로 전국최하위로 완도군 예산의 대부분을 국고지원, 정부지원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재정자립도가 최하위라는 것은 우리지역내 경제산업구조가 취약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는 어려운 지역경제를 위해 정부예산을 더 많이 지원토록 한 것이기도 합니다. 완도군의 ‘09년도 집행예산 3,156억원중 2,920억원이 정부지원으로 지역개발과 예산반영 관련하여 부처간 협력이 절대적이라고 할 것입니다. 행정부지사와 행정안전부 홍보관리관의 경험을 되살려 완도군 예산반영을 위해 많은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예산외에 특별교부세사업 38억원, 70억원의 농촌종합개발사업 등 정부가 주관하는 선정·공모사업에 완도군사업이 빠지지 않고 선정되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올해 예산결산특별위원으로서 내년도 예산에서도 지역발전과 소득사업에 보다 더 노력하고 매진하겠습니다. ▶Q2. 해양수산부 폐지 후 국토해양부에 농림수산부와 통합과 관련해 수산인들의 불만이 커지는 문제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A.먼저 해양수산부가 폐지된 것을 참으로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해양수산부의 폐지는 현정부의 국정책임자와 정책입안자들이 농업과 수산업의 차이를 인식하지 못하는 것에 기인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제사회에서는 지난 96년 해양수산부의 탄생을 미래사회의 투자와 미래동력 산업을 선점하는 본보기로 평가하여 많은 국가들이 우리나라를 다녀가기도 했습니다. 농업은 동일 공간에서 이용행위가 상호배타적인 반면, 수산업은 공유공간에서 이용행위가 중첩되어 업종간 이해관계 및 갈등 조정자로서 정부의 역할 및 기능이 중요한 분야입니다. 특히, 움직이는 중소기업 또는 우리나라의 해외영토로 간주되는 600여척의 원양어선 입어권 확보와 어장개척을 위한 교섭 업무는 국익과 직결되는 효자산업이기도 합니다. 수산정책은 해양을 대상으로 하므로 항만개발 및 관리, 연안관리, 해양환경정책과 유기적 관계를 가지고 수립되고 추진되어야 함에도 해양수산부의 폐지로 인해 농식품부, 국토해양부, 환경부 등으로 그 기능들이 이관되어 있어 주요정책에 대한 책임기관 혼선으로 행정공백 우려되고 있습니다. 또한 농정·수산행정의 현격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산업규모를 이유로 수산업이 농업정책에 비하여 후순위로 소외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수산업의 보호와 수산양식업의 지원을 위해 저는 지난 2월 임시국회 대정부질의를 통해 수산지도직의 지방이양을 강력히 반대한 바 있습니다. 또한 법률적 제도적인 지원체계 확대를 위해 “자유무역협정 체결에 따른 농어업인 등의 지원에 관한 특별법, 국가재정법, 농어촌구조개선특별회계법, 부담금관리기본법”의 개정을 통해 수산업 지원 기금 확대 및 예산확충을 위한 법률안을 제출해 놓은 상태입니다. 또한 수산물품질관리법의 개정을 통해 수입수산물에 대한 검사를 어업인단체가 할 수 있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어선법은 이분화되어 있는 어선검사를 일원화하도록 이미 개정한 바 있습니다. 특히 어가부채로 어려운 어업인을 위해 “농어업인 부채경감에 관한 특별조치법”에 대한 개정법률안을 농림수산식품위원회에 상정하여 금리인하 및 상환조건을 완화할 수 있도록 요청한 바 있습니다. 도서·연안지역을 선거구로 한 국회의원 수가 약 40명 수준입니다. 수산인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으로서 수산관련 이해관계자 의견수렴 및 반영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Q3. 우리나라 수출입물량의 99%가 바다를 통해 이뤄지고 우리나라 식량 단백질 보급율도 수산이 50%를 차지한다는 발표와 미래학자들은 세계는 21세기를 해양의 시대라고 하는데 미래성장의 동력을 바다에서 찾아야하는 중대한 시기에 수산업의 인식에 대해 김의원의 생각은? A. 바다산업, 해양산업은 미래전략산업이며, 신동력산업입니다. 바다를 대상으로 한 산업, 단순한 바다생물의 채취뿐만 아니라 국경을 넘어 남극대륙을 영토로 삼는 원양산업도, 내수면과 육상의 양식산업, 종묘·종패사업, 탄소저감대책으로서 해조류양식산업, 해양바이오에너지 산업 등은 모두가 수산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류에너지, 조력에너지, 파력에너지, 풍력에너지 등은 가장 자연친화적인 에너지이며 바다에서만이 가질 수 있는 에너지인 것입니다. 바다산업은 가장 친환경적인 것이며 가장 생산효율성이 뛰어난 산업입니다. 친환경농업은 육성·지원하고 있으면서도 아직 친환경바다산업의 육성대책은 미미한 실정입니다. 정부가 발표한 녹색성장산업은 그야말로 수산업, 바다산업, 해양산업을 두고 한 것이나 진배없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해양바이오 에너지 산업, 탄소저감대책으로서 해조류 산업 육성은 시급하다고 하겠습니다. 전체 탄소흡수량의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다이며 가장 효율성있는 탄소흡수는 바로 해조류가 하고 있다는 것이 정설입니다. 탄소흡소와 저감대책으로서 해조류 산업은 산업발전의 획기적 전기를 마련해 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 완도군의 경우, 서남해안 해양테크노폴리스 시대를 열어가겠다는 것이 군정목표입니다. 전복, 넙치 등의 일차생산부터 가공, 유통, 수출과 기능성 식품, 기능성약품, 바닷물에서의 희귀물질 추출 등 직간접적인 부가가치는 헤아릴수 없는 분야입니다. 우리나라의 미래성장동력이 바로 완도군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Q4. 지난 1월 신년하례식에서 금일출신 신의준 군의원이 통합의 정치를 지켜달라고 주문했는데 완도 모지역신문에 보도된 내용을 보니 지난2008년에 완도군의원 일부 4명(실명보도)이 대검찰청 검사를 만나 자문을 구했다는 등과 광주지검해남지청 검사는 현직검사에게 말한 것은 제보라고하며 2개월 뒤 대검의 지휘로 광주지검특수부에서 완도관련 내사를 하였다는 사실이 완도신문관련 명예훼손 재판 법정에서 모의원의 증언을 통해 최근 밝혀졌다. 이와 관련 2008년 12월말 완도군 관련 공사, 인사문제 등이 혐의없음으로 검찰의 발표가 있었는데 지역의 문제를 군의원들 일부 4명(K모의원 법정에서 실명증언)이 대검 검사를 만난 뒤 지역의 일이 TV, 언론 등에 보도되어 완도군의 위상이 실추되었다는데 군의원 공천권자 로 포용하는 정치, 함께 가는 정치를 하겠다는 민주당 해남완도진도 지구당 위원장인 김의원의 입장을 군민들이 궁금해 하는데? A. 완도군은 총 201개 섬으로, 유인도만 54개에 달하는 도서지역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도서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으로, 도서지역으로 드물게 풍광좋고, 살기좋은 고장이기도 합니다. 과거로부터 교통의 불편함과 도서지역이 가지는 폐쇄성으로 인해 화합과 통합이 어려웠던 적도 있었으나 이제는 완도읍을 중심으로 금당에서부터 청산, 보길까지 하나된 완도군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다만, 지방선거, 국회의원선거, 농수축협 조합장 선거까지 선거로 인한 민심의 나뉨과 갈등이 새로운 지역문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난 1월 신년하례식에서 포용의 정치를 말씀드렸습니다. 저는 완도군의 가치와 역사에 기반한 완도군민의 진취성기상을 믿습니다. 1200년전 청해진을 설치한 장보고대사의 후예로서 자긍심과 임진왜란· 정유재란시 국가가 어려울 때 수군의 본영으로써 구국의 일념으로 뭉쳐 나라를 구한 애국심과 또한 일제로부터 독립운동의 횃불을 가장 먼저 피워올린 의로운 고장으로써 완도군은 그 기반이 정의로운 땅입니다. 지역을 대표하는 사람들이라면 지역의 이미지를 드높이고 주민들의 소득을 확대 재생산해 되는 일로서 평가받아야 할 것입니다. 저 또한 지역위원장으로서, 지역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으로서 지역민의 여론에 귀 기울이고 대변해 나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Q5. 수산발전을 위해 정부관계자 및 수산인들에게 당부하고 싶은 얘기가 있다면? A. 수산업에 대한 인식전환이 필요합니다. 수산업에 대한 인식전환은 수산인이 나서서 계몽하고 확대시켜야 합니다. 수산업이 고달프고 힘들고 어려운 산업이 아니라, 이제 국가 신성장동력이며, 국가 미래산업이라는 자긍심과 자부심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우리 수산인이 그렇게 주장하면 그대로 될 것입니다. 국가식량산업으로서 국가미래 신성장동력산업으로서 가장 친환경산업으로서 육성되도록 수산업에 대한 인식과 의식을 잡고 새로운 비젼을 제시해야 할 것입니다. 이명박 정부가 공무원조직의 슬림화와 대과 시스템으로 바꾸고 있으나 실질적으로 이로 인한 업무효율화는 꾀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농식품부에 있어서도 부처내 이기주의와 수산에 대한 인식부족으로 수산업의 가치가 저평가되어 있습니다. 이에 대한 분명한 인식전환과 가치평가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Q6. 대한민국 제15대 대통령을 지낸 김대중(金大中.85) 전 대통령이 18일 오후 1시 42분 서거하셨는데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는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고(故) 노무현 전 대통령 수뢰의혹에 대한 검찰 수사와 관련, "노 대통령 개인을 위해서도, 야당을 위해서도, 같은 진보진영 대통령이었던 나를 위해서도 불행"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DJ 측이 21일 공개한 올해 고인의 일기를 보면 DJ는 4월18일자 일기에서 노 전 대통령 일가와 인척, 측근들이 줄지어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고 언급하면서 "노 대통령이 사법처리될 모양. 큰 불행"이라며 이같이 우려를 나타내면서 "노 대통령이 잘 대응하기를 바란다"고 적었다. 그는 이어 5월23일 노 전 대통령 서거 소식에 "자살했다는 보도. 슬프고 충격적"이라고 안타까워하면서 "너무도 가혹하게 수사를 했다. 마치 소탕작전을 하듯 공격했다"고 검찰의 여론몰이식 수사 태도를 강력히 비판했다. 그러면서 "신병을 구속하느니 마느니 등 심리적 압박을 계속했다. 결국 노 대통령의 자살은 강요된 거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김 전 대통령의 생애와 마지막 생각, 국민과 나라 사랑에 대한 마음을 되새기는 친필일기 중 일부가 추모 공식홈페이지를 통해 언론에 공개되었는데 이에 대해 김의원의 생각은? A. 평생을 고난과 박해의 멍에를 짊어지고 민주주와 인권, 남북평화에 헌신해 오셨던 큰 거목이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다섯 번의 죽을 고비와 6년을 차가운 감옥에서 보내면서도 오직 민주주의와 나라발전, 조국 통일을 위해 일생을 바치셨던 김대중 대통령님은 영원토록 우리 가슴속에 함께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1997년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와 대한민국 최대 국난이라던 IMF 외환위기를 조기에 극복했으며, 2000년 남북정상회담을 열어 한반도 평화의 새 장을 여는 등 민주주의와 남북화해, 인권을 위한 평생의 노력으로 노벨 평화상을 수상하기도 했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님은 세가지 유지를 남겼다고 생각합니다. 철학적으로는 ‘행동하는 양심’을, 정치적으로는 ‘통합의 정신’을, 정책적으로는 민주주의, 서민경제, 남북평화의 ‘3대위기를 극복하라는 것’입니다. 현정권은 지난 10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강변하고 있으나 현정권이야말로 민주주의를 1980년대, 30년 뒤로 후퇴시킨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추호의 흔들림없이 김대통령님의 유지를 받들어 민주주의 행진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김대통령이 새로운 희망을 안겨주었듯이 우리 개개인이 모두 분신이 되어 화합의 모닥불을 피워내고 ‘민생중심 서민정당’의 기치를 내걸고 더욱 분발해나간다면 민주당의 정권재창출은 반드시 이루어 질것으로 믿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님 서거 후 전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추모의 물결이 그치지 않고 있습니다. 마지막 일기에 나타나듯이 ‘민주와 인권, 평화의 김대중 정신’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Q7. 끝으로 청해진신문 창간 9주년에 독자 및 군민에게 하고 싶은 말은? A. 완도군은 앞에서도 언급했다시피 1200년전 한반도의 중심, 아시아의 중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재정자립도 전국 최하위의 지역으로 전락했습니다. 21세기 장보고 청해진의 부활! 새로운 발전을 위한 완도군 웅비! 이것이야 말로 바로 완도군민이 추구해야 할 목표이며 또한 청해진신문의 소명이라고 믿습니다. 청해진신문 창립 9주년을 맞아 완도 청해진의 새로운 시대정신을 오늘에 부활시켜 계승 발전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완도군은 우리 국토의 최남단이 아니라 우리국토의 첫발이며, 시작입니다. 21세기 완도군민은 완도군을 시작으로 하여 장보고대사의 새로운 물결을 우리나라 전역으로 펼쳐나가 완도군의 위상과 완도군의 발전을 이끌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청해진신문은 든든한 지역의 버팀목으로서의 역할뿐만 아니라 지역발전을 위한 올곧은 사회 지도자가 양생되는 토대를 만들어 주어야하며 완도군민들은 언론에 지역과 국가를 어우르는 미래 발전비젼을 보여주는 등 상생의 보완관계를 유지해 나갈 것을 부탁드립니다. 세계적인 경제위기가 우리지역 완도에도 그 여파가 미치고 있음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러나 완도군민은 푸르름을 잃지 않는 상록수처럼 꿋꿋하게 본연의 역할에 충실하고 건전한 정신과 시대정신을 지켜가는 모델이 되어 주시길 바라마지 않습니다. 거듭 청해진신문 창간 9주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며 청해진신문이 지역여론의 중심으로 지역민과 함께하는 언론으로 발전하시길 당부드립니다. 감사합니다. <본지 인터뷰에 감사드립니다- 김용환 대표기자,발행인> 새감각 바른언론-완도청해진www.wandonews.kr입력09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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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설-고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사설 고 노무현 전대통령 서거, 진심어린 애도와 특정인 발목잡기 지양해야 지난5월23일에 전국민을 충격으로 몰아넣은 노무현 전대통령이 예상하지 못한 극한 선택으로 운명을 달리하여 조문행렬이 줄을 잇고 500만명이 넘는 인파가 분향소를 찾았다는 보도는 정치권을 뒤흔들어 놓았다. 민주당을 깨고 열린우리당을 만들어 분당해갔다고 곱지않았던 호남민심도 노무현의 진정성을 헤아리지 못했던 점을 후회하고 추모열기가 뜨거웠던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는 추모열기를 감안하여 국민장으로 장례행사를 진행하고 전국16개 시도에 공식적인 분향소를 설치했지만 시민단체가 차린 분향소에 추모인파가 더욱 많이 몰렸다. 민주당은 지구당별로 분향소를 설치하기로 하고 완도군과 협의하여 김영록 국회의원 완도사무국은 군사회단체와 함께 완도읍 해변공원 야외음악당에 분향소를 차렸다. 민주당차원에서 완도군 사회단체와 함께 군민장 분향소를 차린 것이다. 그래도 같은 당적의 단체장이라 애도를 표시하고자 조기를 세워 완도군민을 대표한 국민장의례를 갖춘 것이라 본다. 어떤 누가 군수라 해도 같은 당적의 단체장 이라 군에서 제작한 조기는 세워져야하고 국민장 분향소에 완도군민을 대표한 그 대표성은 존중받을 일이다. 단체장이 다른 기관사회단체장과 함께 분향소에 정중하게 조문의례를 5월25일 오전11시에 마치고나서 한참후인 저녁9시경에 공무를 마치고 사복을 입고 해변을 거닐다 분향소에 둘러 자원봉사하는 여성분들을 찾아 격려했던 부분을 트집잡았던 아니든, 그 어떤 이유를 불문하고 국민장분향소에 완도군민의 대표성인 군수조기를 5월25일 밤11시50분경에 2번씩이나 던졌다는 난동사실을 감춘 채 왜곡된 웬지역신문의 곡필보도는 신중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을만하다고 본다. 완도군청년회원 M모씨는 웬지역신문의 곡필보도를 강력히 항의했다며 언론은 정론 직필해야한다고 분개했다. 분향소 난동사건 현장에는 완도군청년회 전,현직 간부들과 JCI 완도청년회의소 회원들이 야간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관계로 생생한 목격자이며 완도경찰도 출동한 상황에서 일부 군민들과 많은 목격자들이 보고 있었다는 것. 고, 노무현 전대통령을 너무나 뜨겁게 사랑한 충정에서 술먹고 발생한 우발적인 행동이라고 해두자. 노무현 서거이후 바닥을 기던 민주당 지지도가 한나라당을 추월했다. 분당을 비방했던 구민주당인사까지도 노무현 추모열기에 압도당하고 말았다. 당이 결속력을 다지고 대여투쟁의 전열을 가다듬고 있다. 노무현 전대통령서거를 빌미삼아 특정인의 발목잡기를 하는 것으로 비치면 화합을 추스리는 지구당의 입장에서도 바람직한 모양새는 아니라고 볼 것이다. 단체장의 일거수일투족이 관심사가 되겠지만 공과 사는 분명히 구별되어야 한다. 완도군 설군이래 국민장분향소의 조기를 두 번씩이나 던진 L모씨의 난동사건은 청해진완도 역사에 영원히 기록 될 것이다. 한편, 고 노무현 대통령은 애석하게도 이 세상에 없다. 그의 진정성을 헤아려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고 모두가 행복해하는 조국 대한민국건설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과제로 삼고 같은 완도군민이라면 원망과 시비를 하지말자. 새감각 바른언론-완도청해진 www.wandonews.kr 입력:2009060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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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CI(사)완도청년회의소 군 복무자를 위한 어울한마당JCI(사)완도청년회의소 군 복무자를 위한 어울한마당 “보고싶은 어머니” 코너 깜짝 이벤트 ▲ JC 어울한마당 “청년들이여 목소리를 높여라!!!” 라는 슬로건으로 완도JC를 이끌고 있는 2009년도 JCI완도청년회의소(회장 최경필)는 최근 완도에 군복무를 하고 있는 완도경찰서, 완도해양경찰서, 장보고대대 의무복무자들을 상대로 어울한마당 행사를 실시했다. 이날 김영대 전남지구제이시 회장, 임정환 완도부군수, 김재석 완도경찰서장, 김정식 완도해양경찰서장, 김만정 장보고대대 대대장 및 내외귀빈 들이 참석하여 우리 고장을 위해 고생이 많은 의무복무자들에게 축하와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최경필 회장은 인사말에서 완도에서 지역과 조국을 위해 젊음을 불사르는 의복무자 여러분들의 노고에 감사드리며 화합된 분위기속에 기량을 겨루고 대원들간에 단합된 힘도 과시하며 꿈과 희망이 넘치는 건강한 젊은이로써 전진해 줄 것을 당부했다. 나아가 명예완도군민으로써 긍지와 자부심을 살려 전역하더라도 완도를 제2의 고향으로 생각하고 완도홍보대사가 되어 언제나 잃지 말고 기억해 줄 것을 강조했다. 이날 행사는 족구, 농구, 팔씨름, 림보 경기를 하였으며 서로 의기투합하여 펼치는 운동경기속에서 대원들간의 단합과, 운동을 통한 친선과 웃음을 볼 수 있는 뜻 깊은 날이었다. 특히 이날 시상식 및 장기자랑 에서 “보고싶은 어머니” 코너에서는 전혀 알리지 않고 어머님을 모시고 와 깜짝 이벤트를 선 보이기도 했다. 어머님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모든대원들이 나의 어머님이 맞습니다” 라고 무대를 박차고 나오기 시작했다. “10여분간의 내 어머니가 맞습니다” 라는 확신을 하면서 기다리는 대원들을 상대로 무대뒤에서 어머니가 나오면서 극적인 아들과 상봉하여 얼싸안고 감격스러워 울기 시작했다. 이런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모든 대원들이 울면서 눈시울을 적시는 아름다운 광경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날 행사를 통해 완도를 지키는 젊은이들에게 활기와 용기와 생기는 물론 사기를 북돋우는 뜻깊은 하루가 되었다. 새감각 바른언론-완도청해진 www.wandonews.kr 입력:20090429-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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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도청년회의소 일본어, 중국어 무료강좌(사)완도청년회의소 일본어, 중국어 무료강좌 “청년들이여 목소리를 높여라!” 라는 슬로건으로 완도JCI를 이끌고 있는 2009년도 JCI완도청년회의소(회장 최경필)는 완도군민들을 상대로 제8기 일본어, 중국어 무료강좌를 3개월 과정을 지난 4월 15일 시작했다. 이날 개강식에는 임정환 완도부군수와 군민 100여명이 참석하여 외국어에 대한 군민들의 열기를 실감케 하기도 하였다. 최경필 JCI완도청년회의소장은 인사말에서 국제화라는 커다란 시대의 흐름을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외국어는 필수가 되어가고 있는 국제적인 추세이다. 국제적인 감각에 발맞추어 관광완도를 방문하는 일본관광객과 중국관광객을 상대로 관광완도를 소개하는데 외국어는 필수다. 이번 일본어, 중국어 무료강좌가 기회가 되서 여러분들이 관광해설가 및 완도를 홍보하는데 일익을 담당하면서 앞장서줄 것을 당부하기도 하였다. 청년들이 목소리를 높일 수 있는 여러 문화활동과 여건을 만들어 가겠다. 또한 “조국의 미래는 청년의 책임” 이라는 한국JC의 슬로건 처럼 청년들이 솔선수범해서 지역민들에게 다가서는 더욱더 다양한 사업을 펼치겠다고 하였다. 금번 일본어, 중국어 무료강좌는 3개월 과정으로 매주 월, 화, 수, 목 일주일에 4회 1시간20분 수업으로 실시되며, 일본어는 구로미야나오꼬 강사 와 중국어는 장미미 강사가 가르친다. 3개월 수료과정을 마친 학생들은 자체 시험 준비반을 만들어 하반기에 실시할 예정인 JLPT 및 NPT 일본어, 중국어 자격증 시험에 응시할 예정이다. 새감각 바른언론-완도청해진www.wandonews.kr 입력:2009042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