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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한국교회 설교는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가?

기사입력 2010.02.20 0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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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장복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실천신학 교수)

    특별기고 - 정장복 교수 (장로회신학대학교 실천신학 교수)

    한국교회 설교는 설득력을 가지고 있는가?

    설교사역의 위기요소 분석과 그 대안의 모색

    ▲정장복 총장(한일장신대학교)

       

               ▲ 정  장  복  교수
              
    -한일장신대 총장


    서언:

    백년의 역사를 회고하면서 느꼈던 감격과 새로운 다짐들은 벌써 시들기 시작하여 그 함성과 발길을 찾기 힘들다. 교회의 갱신이 필연코 있어져야 한다는 젊은 결단들은 다 시들어져가고, 오히려 교회의 무기력이 이 땅위에 서서히 나타나고 있다. 도덕성의 퇴보와 윤리의 실종현상은 이 민족의 25%를 점유하고 있다는 기독교의 무기력함이 얼마나 극심한지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 시대의 정신세계는 언제나 물질문명의 발전과 반비례한다. 과학의 기술과 경제적 발전이 거듭되는 세계일수록 그 땅의 엄격했던 도덕성과 정신적인 전통성은 퇴색되기 시작한다. 여기에 우리의 한국의 세계도 예외가 되지 못한 채 심각한 진통을 앓고 있다. 특별히 이 땅의 엄격한 유교의 윤리사상과 접목되어 활발하게 행군을 계속했던 우리의 기독교는 어느 시대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심한 딜렘마에 빠지기 시작한다.

    이 땅의 교회의 구성원들도 평범한 시민으로서 삶의 향상과 현대의 문명을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은 너무나 타당한 말이다. 그리고 거기에 설교자도 이 시대에 사는 인간이기에 문명의 이기(利器)를 십분 활용하면서 현대의 특권을 누릴 권리가 있다. 그러나 문제는 상대적으로 시들어져 가는 설교사역의자의 고유한 정신(Ethos)과 사려 깊은 노력의 결핍이 문제이다. 즉 청교도의 신앙에 뿌리를 두고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던 소명의 다짐과 거기에 따르는 설교자의 철저한 생활에 너무나 심한 변화가 일고 있다는 문제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종으로서의 그 고결한 땀과 눈물이 서서히 식어져 가고 이 시대의 혼탁한 물결에 휩싸이지 아니하려는 몸부림이 사라져가는 현실이다.

    그러기에 우리 설교의 단에 불이 꺼져가고 있다는 지적이 일기 시작한다. 그토록 좋은 음향장치를 했고 화려한 장식이 가득한데도 오늘의 설교가 무기력하다. 이 민족의 가슴에 그 유창한 설교가 스며들지 못한다. 설교자를 통하여 전달되어져야 하는 하나님의 말씀이 외면을 당하고 있다. 좀더 솔직한 표현을 한다면 오늘의 교인들은 예배를 드리기 위하여 예배당을 찾아갈 수밖에 없으나 오히려 설교 때문에 깊은 실망을 안고 돌아오는 경우가 적지 아니함을 쉽게 느낄 수 있다.

    이런 현상을 가리켜 설교학계에서는 [설교의 위기]가 도래했다는 진단을 내리게 되고 적신호를 켜게된다. 세계의 어느 교회에서나 발생했던 이러한 설교의 적신호를 보면서 자기점검을 했던 설교자는 살고 그렇지 못한 설교자는 설교의 몰락과 임종이라는 비극의 종점에 이른다.

    2. 성찰을 요구하는 시대적 변화

    회고해보면 한국의 기독교는 이 민족이 고통의 눈물을 흘리던 시절에 들어와 한 세기를 넘긴 종교이다. 이 땅에 기독교가 상륙하기가 무섭게 바로 이어진 한일합방의 민족적 비극이 발생되었다. 그때부터 식민지 교회로서의 울부짖음이 하나님을 향하여 터지기 시작했으며, 순교를 부르는 핍박의 마수(魔手)가 한국교회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리고 일제의 극심한 착취는 계속되어 이 땅의 가난은 극심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러한 비극이 끝나기가 무섭게 남과 북으로 나누인 이 민족은 동족살상(同族殺傷)이라는 더욱 무서운 전쟁의 참화를 겪어야 했다. 이 무섭고 부끄러운 역사의 장이 끝나자 우리의 민족은 이 땅의 공산화를 막기 위한 갖은 노력을 기울였고 곧 등장한 군사정권과 함께 가난의 탈피를 가져오는데 함께 하였다. 그리고 터무니없이 등장하여 칼을 휘두른 정권이 인권을 짖밟을 때는 심각하게 저항하는 기록을 남기면서 [백담사의 귀향]이라는 희귀한 기록을 남기기도 하였다.

    사실 우리의 지난 한 세기는 한일 합방의 비극에서부터 80년대의 군사정치의 횡포에 이르기까지 숱한 변혁을 겪어야 했고, 때로는 잔혹한 삶에 시달려야 했던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이러한 아픔의 역사는 어느 민족에게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고난의 연속이었다. 그러기에 우리의 교회는 어느 민족보다 강한 종말론적 신앙을 가지고 뜨겁게 주님을 부르짖었다. 그리고 말씀에 깊은 뿌리를 둔 신앙의 불을 피우면서 그의 재림을 고대하였다. 한국교회의 한 사가(史家)는 이 때의 신앙적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고 있다.

    이러한 종교의 특징은 , 철저하게 내세적이요 현실 부정적이면서도 가혹할 정도로 경험적이고 감각적인 생태에 접속하게 되어 있어서, 축복과 열복의 상징인 내세의 천국이 여기, 이 땅에서 그 종말의 아련한 대망의 자리에, 물리적으로 체험 가능하게 이르기를 줄기차게 갈망하는 데 있었다.

    지난 한 세기를 돌이켜 보면 한국교회는 이상과 같은 연속된 불운의 늪에서 헤매이는 이 땅의 백성들에게 소중한 피난처이었고 도피성이었다. 그러기에 이 피난처에서 들려지는 말씀은 위로와 힘이 되었고 삶의 방향을 지배하는 막중한 능력을 발휘하였다. 더군다나 그 말씀이 단순히 인간의 발상이나 지혜에 근본을 두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옷을 입었을 때 어느 누구도 감히 그 말씀을 향하여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오직 감사와 감격으로 일관하면서 눈물을 흘렀다. 그리고 거기에는 순종하는 길만을 걷기를 스스로 다짐하는 무리들로 행렬을 이었다. 자신의 건강에 이상이 와도 병원보다는 손쉽게 주의 종을 찾았고, 사업이 무너지는 아픔을 당하여도 예배당의 문전을 찾아 엎드려 기도를 드렸으며, 정치와 사회로부터 상처를 받아도 오직 말씀으로 위로 받기를 바라는 성도들로 예배당은 가득히 채워졌었다.

    이러한 신앙으로 가득한 교회에서는 설교사역은 절대권위를 부여받게 되고 그 강단의 주역은 언제나 거룩한 권위와 반신적(半神的)인 존재로 군림을 한다. 그리고 메시지의 구성이나 전달에 별로 어려움을 겪지 않고서도 특유한 음성과 태도와 영성의 권위만을 가지고서도 우뚝 솟은 교회의 주인으로 등장하는 것이 교회사에 나타난 일반적인 현상이다. 바로 이때의 설교자는 쉽게 카리스마적인 존재로 등장하여 절대영향을 주는 위치를 쉽게 확보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설교의 준비를 위한 큰 부담 없이 자신의 경험이나 예화의 진열로 설교의 시간을 메꾸어도 아무도 그 설교자에게 도전장을 던지는 교인들은 없게된다. 이러한 교회의 양태를 가리켜 흔히들 혼돈과 수난의 교회라고 이름하며, 설교자에게는 이러한 교회의 강단이 오히려 안일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자신도 모른 사이에 계속적으로 그 세계에 머물고 싶어하는 타성을 갖게 된다.

    그러나 21세기의 문전에 도달한 오늘 한국 교회는 달라진 시대의 철로 위를 달리고 있다. 다시 말하면 달라진 세대가 교회의 주역들이 되었고 그 주역들의 눈과 귀는 과거의 것이 아닌 전혀 새로운 시대의 것이다. 어둡고 지루하고 눈물로 얼룩진 불행한 어제의 사연들을 경험하기를 거부하는 그들이다. 그들은 높은 교육수준에서 스스로의 정체성을 확립하려한다. 경제적인 면에서는 비록 상대적 빈곤을 느끼는 경우가 있어도 그들은 스스로를 극빈자로 말하기를 거부하면서 중산층의 세계에 머무는 자신이라고 말하고 또 그렇게 희망한다.

    비록 달동네의 삶을 지속하는 현실이더라도 고임금을 손에 쥐면서 내일에의 희망은 언제나 밝게 꾸며간다. 어둡고 비겁한 정치가들을 과감히 바꾸는 주권을 이제는 행사하면서 절대권위를 인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들은 날카로운 비판의식을 가지고 시(是)와 비(非)를 분별하는 능력을 행사하기 원한다. 뿐만 아니라 맹종의 신앙보다는 합리적인 신앙을 추구하기를 희망한다. 그들은 무식한 설교자보다는 지성적인 설교자를 원한다. 그들은 신선하고 창의적이며 역동적인 메시지를 전달하는 설교자 앞에서는 겸손히 고개를 숙이고 지루하고 아무런 변화도 없이 강단을 지키는 설교자에게는 경멸의 눈길을 보내는 모습을 서슴없이 나타내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눈길을 끌고 있는 것은 50년대와 60년대를 살아오던 세대마저 그토록 간절하게 지켰던 종말론적인 신앙들을 상실한 채, 먹고 살만한 오늘에 대한 애착이 대단히 깊은 상태이다. 이들의 신앙은 이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재림이 연기되기를 바라는 인간심성을 보이고 있다. 결국 이들도 과거 지향적이고 틀에 박힌 설교에 대한 환멸을 느끼면서 새로운 시대에 있어져야 할 신선한 설교자를 찾고 오늘의 수준을 이끄는 설교를 추구한다.

    3. 한국강단을 침몰시키는 요소들

    시대의 변천이나 개인의 발전이 어떤 단계에 이르든지 인간은 빵으로만 살수 없는 피조물임을 스스로 알고 한국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경청하기 위해서 아직껏 교회를 찾고 있다. 특별히 하나님 신앙은 그 표현에 있어서의 문제는 있었으나 "기독교나 천도교만이 소유한 것이 아니라 한국인 전체가 공유한 아득한 옛부터의 신앙임"을 인정할때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는 사역은 이 땅의 종교문화로부터 거대한 위치를 차지고 있다.

    이런 종교문화에 발판을 둔 한국 기독교인들의 특별한 심성은 신의 말씀을 전하는 메신저에 대한 대단한 존경을 갖게 되고 주어진 메시지에 관하여는 최우선적인 경의를 표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여기서 깊은 주의를 요하는 것은 첨단의 문화에 승선(乘船)한 현대의 기독교인들은 선포된 메시지에 맹종적인 경청이나 추종을 하지 않고 나름대로의 판단을 거쳐 소화 내지 거부를 한다는 현실이다.

    이제 우리는 여기서 중요한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목이 쉬도록 외친 오늘의 설교자 앞에 앉아 있는 성도들이 그 설교에 만족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문제이다. 현대 커뮤니케이션의 이론대로 전달한 메시지가 의도한데로 회중들에 의하여 공유(共有-Sharing)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솔직히 설교자가 자신이 전한 메시지에 대한 메아리가 최소한 다음의 것들이기를 바라는 것은 조금도 이상할 수 가 없다.

    "목사님, 오늘의 설교는 저의 생애에 소중한 결단을 가져오게 했습니다."

    "목사님, 오늘의 설교에서 깊은 은혜와 감명을 받았습니다. "

    "목사님, 오늘의 말씀을 통하여 저의 고민하여 온 문제의 해답을 받았습니다."

    아직도 이러한 주옥같은 반응을 받은 설교자들이 한국의 땅에 분명히 있다. 그리고 그들의 교회가 성장을 거듭하면서 생명이 차고 넘치는 말씀으로 가득한 현장을 본다.

    그러나 대부분의 한국교회 강단에서 위와 같은 응답을 듣는다는 것은 설교자의 희망사항일 뿐 실질적으로 설교자의 귀에는 좀처럼 들리지 아니한 것들이다. 오히려 설교자의 가슴을 너무나 아프게 하는 다음과 같은 속삭임이 설교자의 귀에 훨씬 쉽게 들려온다.

    "오늘도 예화의 진열장으로 설교가 끝이 나고 말았군"

    "또 자신의 경험과 세상 이야기를 나열한 채 그 아까운 시간을 보내고 말군"

    "아무런 감동을 주지 못한 자장가에 불과 하기에 나는 잘 수밖에 없었어"

    "이제는 지겹고 실증만을 불러일으키는 설교가 되어 더 이상의 인내는 힘이 들어"

    여기서 우리의 설교자들은 깊은 생각을 할 필요가 있다. 무엇 때문에 오늘의 설교현장은 이렇게 슬픈 반응을 받게 되며 침몰되어가는 조각배의 위기에 직면하고 있는가?

    분명코 까닭이 있다. 까닭이 있기에 문제가 발생되었다. 그 문제들은 지금껏 설교자를 반신적(半神的)인 존재로 절대화 시켜온 우리의 강토에서는 언제한번 시원스럽게 파해쳐보지를 못하였다. 유교의 유산으로 너무나 오랫동안 이 땅에서 지속해온 계층의식은 설교자의 모순과 이탈을 감히 지적하지 못하도록 하여왔다. 이것이 바로 수직문화의 비극이요 더 낳은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였다. 그 결과는 오늘의 설교를 위기의 상황으로 몰고온 독소들을 오히려 더 확산시키게 되었고 오늘의 설교위기를 초래하고 있다. 무엇이 우리의 성스러운 설교의 사역을 병들게 하는 요소들인가?

    1). 설교 전문인을 위한 교육과정의 시급성

    교육이란 천부적인 특수한 재능을 가진 자에게는 그것을 더욱 개발하여 빛나게 하는 것이며 그렇지 못한 자에게는 후천적인 노력을 통하여 어느 한계에 도달하게 만드는 거대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교육이란 모든 분야의 필수적인 것이며 초석이 되는 것이다. 특별히 특수분야의 경우는 그 교육은 훈련의 성격을 동반하면서 전문인으로서의 기능과 위치를 확보해주는 중요한 역활을 감당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전달해야 하는 사명자들은 누구나 함부로 감당할 수 없는 특수분야의 전문인들이라는데 아무런 이의를 달지 않는다. 이 말씀의 사자들은 인간사회가 지향하는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기 전에 신과의 깊은 연접(Link)과 그것을 지속하는 높은 영성(靈性)의 지속을 요구한다. 그리고 거기에 더하여 필수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터득할 수 있는 기본 실력을 쌓아야 하고 그 말씀을 전달하는 방법과 기술에 대한 교육과 훈련을 받아야 한다. 더욱이 설교를 듣는 회중들의 교육수준이 고도화 되어가는 오늘에 설교자가 갖추어야 할 기본적인 설교의 이론과 실제 과정의 성실한 이수는 그 시급성이 어느 때보다 절실하다고 본다.

    다음은 1925년 강도학(講道學)을 펴내는데 역자로 참여했던 고려위(高麗偉)는 오늘 우리가 반듯이 음미해야 중요한 부탁을 남긴바 있다.

    福音은完全無缺한眞理이나其傳하난方法의巧拙이잇셔聽衆을感분激昻케하난

    差等이不無하니講道의效果를獨히聖神의게만依하고其法을少許도學習하지

    아니하니함은妄信이오愚見이라

    2). 극도에 달한 "나"의 등장

    전통적으로 설교사역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오늘의 회중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운반하는'말씀의 사자'로 이해되어 왔다. 이러한 관점에서 칼빈이 설교자를 하나님의 위탁을 받은 대사(Ambassador)로 이름하였다. 그리고 칼 발트도 설교를 정의 할때 "하나님이 선택한 설교자를 통하여 인간들에게 들려운 하나님 자신의 말씀"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전통적인 설교자에 대한 견해는 오랫동안 기독교의 강단에서 지속해왔다.

    그래서 설교는 언제나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해석하고, 삶의 장에 적용해주어야 하는 당위성을 가지고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러한 맥을 이은 한국 교회에서도 처음부터 그렇게 가르쳐왔다. 한국의 신학교육의 초창기 부터 설교학을 가르쳤던 곽안련 교수는 "설교인은 청중에게 향하여 마치 '내 말을 들으라 내가 아는 바를 너희에게 말하겠다.'와 같은 태도"는 절대 금물임을 강조해왔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을 받은 평양신학교 출신 설교자들은 자신들이 받은 설교의 교육을 실현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오늘의 설교자들은 전혀 다른 세계를 달리고 있다. 설교학 교육의 수준이 경험담을 들려주는데 끝난 시절의 피교육자들인 이들은 신언(神言)과 인언(人言)을 분간하지 못한 경지 속에서 설교의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 우리의 귀에 들려져야 할 설교문장은 예를 들면 분명히 다음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 말의 뜻은 바로 이런 말씀입니다. 예를 들면 이러한 경우 (간단한 실례-예화)를 가르킨 말씀입니다" 또는, 우리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하여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는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그 뜻은 이러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이러한 사례의 경우입니다."

    이처럼 모든 설교의 문장의 주어는 성삼위(하나님, 예수님, 성령님)으로 분명하게 구성되고 그 뜻을 밝혀주고 적용을 해주는 것이 설교의 본질이다. 이럴 때 만이 메시지의 주인이 뚜렷하고 설교자가 단순히 도구(Instrument)의 역을 감당함이 분명해진다.

    이러한 신언의 부각은 주어를 중심하여 엮어진 인도 유럽말의 경우는 조금도 지장을 받지 않고 너무나 당연하게 지켜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언어는 술어중심의 언어로서 주어가 너무 많이 생략된다. 더욱이 일인칭 주어는 아예 생략하여도 조금도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정감을 더해주기에 주어 없는 문장의 활용이 너무 보편화되고 있다.

    이러한 결과는 오늘의 설교자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고 있는 다음의 종결어(終結語)에서 너무나 뚜렷하게 나타나고 있으며 그로 인한 설교의 탈선이 얼마나 심각한가를 충분히 입증을 해 주고 있다.

    '축원합니다.'' 믿습니다' '원합니다.''바랍니다' '생각합니다' '느낍니다'

    '기원합니다'

    이상에서 본 종결어의 주어는 어떤 경우도 설교자 (나) 자신이다. 여기서 외국의 설교자와는 달리 한국의 설교자는 너무나 자신의 등장을 극심한 경지에까지 끌고 가고 있다. 이러한 현상의 결과는 설교내용이 설교자의 말과 경험과 지식과 그가 즐겨쓰는 예화로 완전히 채색된다. 그리고 회중들로부터 '아멘'만 유발시키면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변화된다는 착각에 빠지고 있다. 이러한 현장에서 너무나 뚜렷이 나타난 현상은 막상 전해져야 할 하나님의 말씀은 설교자의 말에 가리워져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는다는 사실이다. 말씀의 주인이 나타나지 않은 설교, 그것은 가장 심각한 설교의 위기를 몰고온 위급한 요소라 아니할 수 없다.

    3) 한국의 설교자와 설교 횟수의 축소

    개신교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에 촛점을 둔 종교임에 틀림이 없다. 그래서 언제 어디서나 말씀으로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우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한국 교회도 말씀을 사랑하고 그 말씀의 선포가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그 말씀이 신선한 내용과 타당한 논리를 수반하지 않고 시간을 메꾸기 위하여 지속적으로 외쳐진다면 거기에는 새로운 문제가 등장하지 않을 수 없다. 뿐만 아니라 동일한 인간에 의하여 동일한 메시지가 반복되어진다면 말을 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에게 막중한 부담을 안겨주게 되며 바라는 효과성은 지극히 제한을 받게된다.

    우리의 한국교회의 설교자가 감당해야 하는 설교의 횟수와 그 양은 실로 지탱할 수 없는 한계에 도달하고 있다. 한 주간을 두고 보면 주일 낮설교를 비롯하여 주일밤, 수요일 밤, 그리고 매일의 새벽과 금요철야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설교자는 설교의 홍수 속에 휘말리고 있다. 최소한 주일 낮과 밤, 그리고 수요일밤 만을 계산해도 일년에 165회의 설교를 해야하고 10년이면 1560편의 설교를 해야 하는 실정이다. 과연 이런 짐을 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것인가? 한 설교자가 소유하고 있는 언어와 지식은 한계가 있는데 이런 상황 속에서 어떻게 늘 신선하고 역동적인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면 실로 부끄러움에 가까운 사건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세계의 어느 교회를 가보아도 한국 교회처럼 설교만을 의존하는 예배가 이렇게 빈번한 사례는 찾아보기 힘든 형편이다. 그리고 설교의 역사에 아무리 위대한 설교가라 하더라도 수 천편의 설교를 남겼다는 기록은 아직 읽어본 적이 없다. 그런데 우리의 설교현장만은 이 엄청난 사역을 진행시키고 있는 참으로 기이한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어쩔 수 없이 수 없는 반복을 거듭해야 하고 거기에 더하여 기계적인 습성, 그리고 만성적인 언어의 유희를 수반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럴 때 교회의 강단은 생명력을 잃게 되고 설교는 몰락의 벼랑을 향하여 서서히 달려 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기에 설교의 횟수를 줄이는 것이 설교자와 회중의 수명을 연장시키는 길이라고 본다. 주일의 낮예배 만은 하나님과 인간에게 부끄러움 없는 반듯한 설교를 하도록 하고 주일밤과 수요일 밤의 기도회 등은 모두 성경강해 또는 계획된 성경공부를 비롯한 효과적인 프로그램을 개발 할 필요가 있다. 이럴 때 설교는 기다림 속에서 경청을 하게 되고 새롭고 신선한 말씀으로서 회중들의 심령에 심어 질 수 있다.

    교회의 예배가 진정 목사의 설교에 성패를 건다는 것은 너무나 무모한 일이다. "기독교 신앙을 전하는 데 있어서 독보적 존재로서 우상화되어 왔던 설교는 이제 그 왕관을 벗을 필요가 있다"라고 설파한 베델(Theodore Wedel)의 말에 새삼스럽게 귀를 기울여 음미해 볼 필요를 느낄 시점에 와 있다고 본다.

    4). 설교의 복제문제와 개발의 필연성

    설교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매일 받아먹었던 만나와 같은 것이다. 그때의 만나는 어제의 것을 오늘 다시 먹을 수 있는 것들이 아니었다. 안식일을 제외한 모든 날들은 그 날 받아 그 날 먹어야 했던 가장 신선한 양식이었다. 생각하면 오늘의 설교도 언제나 신선한 만나와 같은 양식으로 회중들의 심령에 넣어 주어야 하는 것이 너무나 타당한 일이다. 그러기에 설교자는 한 주간 내내 말씀의 전달 때문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 몸부림을 치면서 메시지를 받고, 그 말씀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에 자신의 시간을 아낌없이 내놓아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그 말씀에 먼저 용해되는 감격을 경험하고 난 후에 회중들 앞에 서서 그 감격의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그런데 한국 교회는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하나의 이변이 발생하고 있다. 그것은 설교집의 출판이 당연한 경쟁처럼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 목적이 뚜렷하지를 아니하다. [나는 이렇게 설교를 했다]는 자랑인지 아니면 단순히 자신의 설교를 기록화 시켜 교인들에게 다시 읽히도록 하는 목적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그러나 두 가지의 뜻하지 않은 부작용을 수반하는 경우를 본다. 하나는 동역자 된 설교자들이 그 설교문을 그대로 복사하여 강단에 들고나서는 부끄러운 죄를 유발시키는 것이고, 둘째는 자신이 펴낸 설교를 교인들이 읽고 난 후 어느 때인가 [목사님은 지난번 했던 설교들을 다시 재탕하십니다] 하면서 새로운 실망을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이다.

    여기서 필자는 후자보다는 전자의 사건에 더욱 깊은 두려움을 가져본다. 자신이 먹이고 가꾸는 양들을 위하여서 목자는 더 좋은 꼴을 찾아 헤매이는 수고를 해야함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그러한 땀을 흘림이 없이 다른 목자가 이미 먹여버린 것을 울 넘어 가져다가 자신의 것인양 내양들을 먹여도 되는 것인지를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이런 행위가 습관화되는 날 찾아오는 결과는 참으로 비참한 것들이다. 그것은 자신의 설교능력이 급격히 저하되어 그 회복이 너무 어려운 지경에 이른다는 사실이며, 또 하나는 회중들이 다른 곳에서 듣거나 동일한 설교집을 읽은 경우 조금의 동정도 없이 경멸의 시선을 자신에게 보내게 된다는 사실에 깊이 유의해야 한다.

    현대를 달리는 설교자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교회마다 그들의 환경과 수준과 신앙의 특수성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만을 위하여 필요한 양식이 요구된다는 사실이다. 결코 남의 설교를 복사하여 그대로 먹일 수 없는 자신들의 양들임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삯군된 목자는 그 이마에서 땀 흘리기를 거부하고 쉽고 편한 곁길을 즐겨 찾을 수 있다. 그러나 참 목자는 눈물과 땀을 때로는 피까지 흘리기를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양들의 먹이를 찾아 먹인다.

    홍수처럼 쏟아진 설교집이 오늘의 설교사역에 에덴동산의 과일처럼 등장이 되고 설교자들에게는 뿌리치기 어려운 유혹이 되고 있다. 특별히 자신이 설교를 하려는 본문과 주제를 결정한 후에 설교자의 손이 서서히 남의 설교집을 만지고 그 눈길이 거기에 머물려는 유혹은 참으로 곤혹스러운 것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참된 설교자는 거기서 과감한 결단을 내리면서 야곱처럼 자신의 환도뼈가 상하더라도 하나님을 붙들고 내 양들이 살찔 수 있는 양식을 달라고 매어달리면서 펜을 잡고 자신의 설교원고에 받아쓰는 과정을 밟아야 할 것이다.

    본훼퍼가 조국에 돌아가 히틀러의 칼날을 피하여 지하의 신학교에서 설교학 교수로서 열강을 토하면서 남긴 말이 새삼스럽게 한국의 설교자들을 향하여 들려지고 있다.

    "설교는 성육신 하신 그리스도 그 자신이다....말씀으로서 회중들 가운데를 걷고 있는 그리스도 그 자신이다." 그렇다 설교자는 오늘 자신의 간절하고 절박한 기도와 땀흘린 준비가운데서 그리스도가 나에게 맡겨진 회중들에게 오셔서 그 가운데 걷도록 해드리는 것이 오늘 한국의 강단을 지키는 설교자의 진정한 사명이다.

    5). 설교자의 땀과 피로 적시는 설교

    [목회의 장(場)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어떤 것이라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질문을 목회자들에게 던질 때 응답자의 70%가 설교라고 대답을 한다. 이러한 응답은 설교자들의 생활 속에서 그대로 반영이 된다. 그들은 계속적으로 이어지는 설교에 대한 부담을 앉고 살아가는 현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설교자들이 막상 설교준비를 위하여서 내놓은 시간은 30%도 되지 않은 다는데 그 심각성이 내재하고 있다. 설교가 목회의 장에서 70%의 비중을 차지한다면 자신의 시간도 그 정도를 할애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는 모순을 안고 있다.

    설교자는 성령의 손에 잡힌 도구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러나 설교가 수록되어진 녹음기와 같은 단순도구가 아니다. 설교사역은 언제나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을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전달하는 일이다. 그러기에 설교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달하기 위하여서는 자나깨나 명령을 기다리고 생각하고 자료를 찾아 헤매이는 것이 생활의 전부가 되어야 한다. 사실 설교의 준비는 끝없는 정성과 준비가 요구되어진 특수한 사역이다. 이런 까닭에 설교자는 남달리 건강한 영성를 가꾸어 영적으로 건강한 호흡을 하는 존재여야 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터득할 수 있는 지적인 바탕과 성장을 쉬지 아니해야 할 존재이다. 여기서 다시 한 번 브라이트 신학교 설교학 교수였던 베켈히머(H. Beckelhymer)의 말을 되새겨 본다.

    성공적인 설교란 쉬운 것이 아니다. 설교를 쉽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성공적인 설교가 무엇인지조차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설교란 한 인간의 신앙과 정성어린 마음과 언어의 기술과 그리고 지적인 모든 바탕의 최고점을 요구하는 중요한 일이다.

    이러한 설교자는 25분의 설교를 위하여 최소한 25시간을 쏟을 수 있는 시간을 필요로 한다. 즉 매일의 오전 4시간은 설교준비를 위하여 바치는 설교자여야 한다는 결론이다. 그리고 삶의 장에서 주어진 말씀을 적용할 수 있는 정황을 누구보다 예민하게 감지 할 수 있는 예지의 감각이 추구한다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은 심방을 비롯하여 각종행사와 기타의 일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쏟아버리고 피곤한 주말에 설교를 준비한다고 앉아있게 된다. 이러한 설교자에게 시선한 만나가 주어지고 그 말씀의 깊은 의미를 터득 할 수 있는 길이 열릴 수 있는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다. 피곤과 졸음의 산실(産室)에서 과연 생명을 깨우치는 설교가 이룩될 수 있는지를 묻지 않을 수 없다.

    6). 성언이 없는 설교의 범람

    설교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려지지 않은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기록되어진 말씀이 설교자에 의하여 현장의 언어로 선포되어지지 않고 해석되어지지 않은데 기인한다. 설교는 설교자의 사상이나 경험이나 유명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종교수필 또는 교양강좌가 아니기에 언제나 기본적으로 봉독되어진 성경의 말씀을 선포하고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이 설교자의 정도(正道)임은 수차에 강조해온 사실이다. 그러기에 진정한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현장에 얼마나 많은 회중들이 모여 열광적으로 '아멘'을 연발하는가에 눈을 뜰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얼마나 충실히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그들에게 들려주었는지에 깊은 관심을 갖는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의 강단에서는 참으로 부끄러운 설교자의 연출이 속출하고 있다. 즉 설교자가 하나님의 말씀인 본문의 봉사자가 아니라 지배자로서 군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설교자가 자신의 생각과 사상, 그리고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흥미진진한 예화를 나열한 후에 하나님의 말씀인 본문을 들려주는 현상이 너무나 빈번하게 발견되어지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의 지식과 분석, 또는 경험을 실은 이야기하고 난 다음에 그 경험담에 좀더 튼튼한 신빙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설교가 시작되기 전에 봉독한 본문을 인용하여 본문은 설교자를 위한 하나의 징검다리 역할 이상을 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설교의 현실을 우리의 한국교회에서는 너무 자주 보게된다. 이러한 선상에서 오늘도 설교사역을 감다하고 있는 설교자는 다음의 말에 깊은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메시지의 재원이 시대적인 사건, 문학, 철학, 정치 이데올로기 등이 될 수는 결코 없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설교자 자신의 경험과 감정까지도 설교의 원천이 되어서는 안 된다. 오직 설교의 메시지는 성경에다만 그 원천을 두어야 한다.

    여기서 한국의 강단이 인식해야 할 또 하나의 사실은 설교는 단순한 신앙간증과는 너무나 다른 구속력을 가지고 있다는 문제이다. 신앙간증은 자신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자신의 경험과 판단에 기준을 두기 때문에 회중들로부터 공감대만 형성하면 된다는 지극히 한정된 제약을 받는다. 그러나 설교는 그 기준이 그 날의 설교본문에 있다. 그 본문은 설교자와 회중 모두에 의하여 함께 읽혀진다. 거기서 회중들은 그 말씀에 대한 기본적인 이해를 소유한 상태에서 설교자가 그 말씀을 어떻게 선포하고 해석하고 자신들의 삶의 장에 적용시켜주는지를 주시하게된다.

    그러기에 설교는 수많은 회중의 감시를 받으면서 본문이 말씀한 범위를 벗어나서는 아니되는 엄격한 제한을 받고 있다. 결과적으로 설교자는 말씀의 주인이신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그 말씀을 듣기 위하여 설교자의 앞에 앉아 있는 무리들로부터 우선적으로 봉독되어진 말씀의 지배자가 아닌 봉사자가 될 것을 철처히 요구를 받게된다.

    7). 물량주의와 기복사상을 심는 설교의 실상

    설교는 시대상황에 따라 메시지의 방향이 어느 한편에 치중될 수 있고 또 그러하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시대의 형편이 어떤 위치에 있던지 그 메시지는 하나님을 중심하여 그 나라와 의를 확장해 나가는데 그 기본적인 목적을 두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 메시지의 바른 형태이며 지난 수 천년 동안 설교사역의 주역들은 이 괘도를 지키기에 심혈을 기울여왔다.

    그런데 우리의 한국 강단은 이 땅의 종교문화에 너무 극심하게 편승을 하고 있다. 즉 가난을 탈피하고 한을 풀어 풍족한 복을 누리려는 절박한 욕구를 종교에서 채우려는 신앙심을 그대로 수용하는 메시지가 범람하고 있다. 즉 하나님이 무엇을 원하시는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회중들의 영과 육과 범사가 잘되어 복을 담아야 할 그들의 창고가 차고 넘치는 길을 알려주는데 주안점을 둔 설교가 너무나 보편화되어 있다. 거기서 다시 한번 한국의 강단이 흔들리고 침몰의 위기를 맞는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결과는 회중의 가슴을 울리고 반성과 회개를 촉구하는 예언적 설교의 현장에는 교인들이 모이지를 아니하고 [축복의 성회],[신유의 성회], [은사의 성회]라는 현수막이 있는 곳에 한국 성도들의 발길이 무수히 몰리게된다. 바로 이런 사연들이 오늘의 설교사역을 어둡게 만들고 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회중들의 기복위주의 취향에 따라주지 않은 설교자는 외면 당하고 떠나주기를 바라는 지극히 이기주의적인 성도를 양산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바로 이것이 기복사상과 물량주의에 촛점을 두고 목이 쉬도록 외쳐온 설교가들이 맞는 자업자득의 현상이다.

    8).설교의 내용과 설교자의 삶에 대한 괘리현상

    필자가 한국교회의 평신도를 대상으로 하여 연구 조사한바 있는 [설교사역자에 대한 평신도의 의식구조 분석]에서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바있다. "귀하가 아는 설교자들에 대하여 생각할 때 그들의 설교와 삶의 연관성이 어떠하다고 보십니까?" 여기에 대한 응답자의 80.2%가 "완전치는 못하지만 설교대로 살려고 노력한다."고 응답을 하였고 10.3%는 "설교자는 설교하는 대로 생활한다."라고 대답한 바 있다. 이러한 응답의 비율은 서구교회에 비교하여 월등하게 높은 비율이다. 이것은 바로 이 땅이 유교문화의 영향권에서 오랫동안 정착해온 결과로서 도덕성의 강조와 선비의 고결한 인격성에 대한 높은 기대가 그대로 나타난 현상이라고 본다.

    문제는 오늘의 설교자들이 가장 고결한 성직인 목사로서 자신이 전달한 메시지를 먼저 실천하는 본을 보이고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설교자의 대답이다. 여기에 대한 솔직한 대답은 최근에 들어와 대단히 부정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사회에서 실종의 위기에 직면한 윤리와 도덕성이 설교사역자들의 삶과 인격에 의하여 살아나지 못한 채 오히려 심각한 탈선이 여기저기서 발생되고 있다. 성전에서의 살인사건, 밀수에 가담한 목사들의 이름, 그리고 외화낭비에 선두주자로서의 목사의 생활, 외국신학교의 분교를 설치하고 박사학위를 남발하는 주범들로서 신문에 그 이름이 오르내리는 현상은 오늘의 설교사역을 가장 멍들게 하는 치욕적인 보도들이다.

    설교자가 이 땅에서 풍겨오던 고유한 상은 남다른 것이었다.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헌신적이고 검소한 생활의 주인이었으며 풍기는 인격에 있어서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고결한 품성과 지식을 소유한 것이 한국의 설교자 상(像)이었다.

    그러나 오늘의 현실은 목사는 물질의 풍요를 앞서서 누리는 상류사회의 생활인들로 변화되고 때로는 극소수의 설교자들에 의하여 자신이 외친 메시지와 자신의 삶과 인격과는 무관할 수 있다는 생각을 펼치면서 이 땅의 설교사역을 어둡게 하고있다. 여기서 우리는 한국교회의 설교자들이 "생활하는 집과 말씀의 집"을 따로 지을 때 설교사역에 찾아드는 슬픈 비극적 결과는 실로 엄청날 것이라는데 유의해야 할 것이다.

    9). 목회의 수단과 방편이 될 수 없는 설교

    설교란 기본적으로 어떤 경우에 있어서도 설교자 개인의 불편한 심기를 표현하거나 자신의 유익을 추구하려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편이 될 수 없다. 설교란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발산하는 무대가 될 수 없고 회중을 선동하여 자신의 개인적인 집단으로 만들 수 없다.

    그런데 현대의 소수의 설교자들에 의하여 설교의 본래적인 성격이 퇴색되기 시작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지식과 연구의 결핍을 회중들로 보지 못하게 하는 방법으로서 신비주의를 도입하는 사례를 본다. 방언과 예언의 신비한 현상을 유도하여 그것이 말씀 위에 군림하도록 하는 실수를 범한다. 그것만이 아니다.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직접적인 지적을 하면서 때로는 위협을 한다. 그리고 자신의 권위를 절대화하여 심지어는 저주를 행하는 모습을 본다. 이럴 때는 마치 설교자가 하나님으로 둔갑한 모습을 자행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햐 하는 강단은 헌금을 수집하는 무대로 변하기도 한다.

    이러한 현상을 가리켜 설교가 목회자의 뜻을 펼치는 수단의 방편이 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한때 우리의 목회자들의 사회에서는 부끄러운 이야기들이 오고갔었다. 부흥집회를 위하여 강사를 모실 때 특유한 방법으로 헌금을 많이 하게 하는 강사를 초빙을 하면서 수입을 어떻게 분배한다는 약속을 했어야 하는 시절도 있었다. 생각하면 얼마나 한국교회의 강단이 철저하게 탈선하고 있었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이처럼 우리의 설교가 목회적 수단으로 이용되는 효과적인 이기(利器)로 전락된다면 거기에는 밝은 내일이 있을 수 없다. 오직 어둡고 침울한 장래만이 있을 뿐이다.

    언제나 설교는 "은혜의 효율적인 방편으로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것"이지 결코 인간적인 욕구를 채우기 위하여 또는 설교자의 정신적 피곤을 풀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진정한 설교는 "인간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 위에서 죽게 하시고 다시 살리신 구속의 역사를 통하여 인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생명의 선물을 전하는 것"이다.

    10). 설교자의 착각적 과신(過信)의 문제

    인간이란 자신이 행하고 있는 일에 대한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는 일은 일의 진전에 절대적인 요소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일정한 일을 수년을 넘게 계속하면 스스로 진전 시킬수 있는 요령과 기술이 터득되면서 전문인의 세계를 달리게 된다. 그럴 때 누구의 추종도 불허하는 자신의 고유한 영역의 성을 쌓게 된다.

    설교사역 역시 이상과 같은 이론을 도입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므로 어느 설교자나 자신의 강단에 설 때 자신이 넘치는 모습을 보이고 유창한 설교를 펼쳐나간다. 그 몸가짐에서 그리고 슬슬 쏟아져 나오는 달변에서 회중은 설교자의 전문성과 그 성스러운 직책에 대한 인정을 한다. 그리고 아멘을 연발하면서 그 설교에 심취되는 경우를 본다. 이런 현상 앞에서 어떤 설교가도 자신의 부족에 대한 인정을 좀처럼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설교자의 설교를 비데오에 담아 설교자 자신이 보도록 할 때마다 거의 모든 설교자가 반응하는 다음의 말은 우리가 깊이 음미해 볼 만하다.

    "저게 나의 설교인가요? 저 정도의 수준에 불과하던가요? 실망인데요."

    이 반응의 응답은 바로 자신의 설교가 자신이 생각했던 수준에 미달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 필자가 십 수년이 넘도록 경험해온 설교학 교실에서의 실태는 아무도 자신의 설교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우월하다는 반응을 보이는 설교자가 없었다. 환언하면 거의 모든 설교자가 착각적 과신의 늪에 빠져서 설교사역을 진행하고 있다는 결론이다. 많은 설교자들이 자신에게 설교향상을 위한 겸허한 노력이 얼마나 시급한지를 모른 채 이어지는 설교를 메꾸면서 달리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자신도 모른 사이에 어느덧 자신감이 형성하게 되고 드높은 권위의 의자에 앉아 교주적(敎主的) 자세를 취하게 된다는 슬픈 그림을 그리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자연적으로 스스로를 성공적인 설교자라고 자부하게 되는 교만의 자리를 향하게 된다. 평생을 설교학 교수로 살았던 일리온 죤스(Ilion Jones)는 조각가 도발드슨 (Thorvaldsen)의 말을 연상하면서 "설교자가 자신의 설교에 만족할 때 그는 스스로 내리막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라고 갈파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설교자가 자신은 초보단계를 벗어난 완벽한 설교자라고 자랑할 수 있는 시간은 결코 오지 않는다"고 가르치고 있다. 완벽한 설교를 추구하는 설교자는 있으나 완벽한 설교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 설교학에서 반복하여 가르치는 말이다.

    그런데도 자신의 설교가 최상의 단계에 이른 것 마냥 믿고 더 이상의 발전을 추구하지 않은 착각적 과신의 주인들이 우리의 한국교회에 강단에 너무 많이 서 있음을 볼 때 한국교회의 미래가 지극히 염려되지 않을 수 없다. 진정 설교의 자만과 교만에 빠져 있는 설교자에게는 성령의 도움이 떠나고 다음의 말씀만 그 귀에 들려줄 것이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맺는말:

    1960년대 후반에 클라이드 리드(Clyde Reid)에 의하여 설교의 위기 (Empty Pulpit)라는 적은 책이 출판되자 미국의 교회를 비롯하여 수많은 설교자들은 심한 충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리드는 이 책자를 통하여 지금까지 안일하게 설교의 사역을 감당해 오던 설교자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은 대담하면서도 솔직한 도전장을 던진 바 있었다.

    여기에서 강단이 비어 있다는 말 (empty pulpit)은 목사가 없는 교회 강단을 의미한 말이 아니다. 오히려 목사가 강단을 지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좌석에 앉아 있는 교인들이 말 할 수 없이 허전해 하고, 전혀 의미를 발견하지 못하며 말씀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심각한 곤경에 부딪쳐 있는 오늘의 강단을 의미한다.

    지금으로부터 30여년 전에 미국의 강단을 향하여 있었던 이러한 예리한 지적이 전혀 생소하게 들려지지 않는다. 오히려 오늘 우리의 한국교회 강단을 향하여 직선적으로 들려주는 고마운 지적으로 받아드리고 싶은 충동을 더욱 절실히 느낀다. 그 이유는 위에서 지적한 부끄러운 사연들이 오늘 우리 한국의 강단에서 벌써부터 발생하고 있었으며 지금은 오히려 더 심각한 경지에 이르러 '설교의 몰락' 또는 '설교의 임종'이라는 슬픈 비판들이 등장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오늘의 한국교회 설교사역은 아직도 건제(健在)한 면이 없지 아니하다. 선진국의 교회에서 볼 수 없는 설교자의 뜨거운 기도가 있고 생사를 걸고 뛰는 목회의 열심이 있는 한국교회이다. 그리고 아직도 순교의 피가 우리의 바닥을 흐르고 선교의 뜨거운 열기가 쉬지 않은 우리의 교회이다. 어떤 땅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없는 하나님 말씀에 대한 심취성이 강한 우리의 성도들이 가득하다. 그리고 아직도 앞에서 열거한 설교의 위기요소에 물들지 않은 맑고 귀한 설교자들이 우리의 한국교회를 지탱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한국 교회는 세계의 교회역사에 특유한 교회가 되기를 희망한다. 얼마동안 왕성했다가 시들어지는 기록을 역사에 남긴 채 그 명맥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는 서구교회의 후예가 되기를 거부한다. 세상 끝날까지 부흥만을 지속하는 교회가 되겠다는 이 소박한 소망의 실현을 위하여 이 땅의 목회자들은 자신이 드릴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바치면서 땀과 눈물을 오늘도 쏟고 있다.

    그러나 국민소득의 향상에 기인한 물질만능의 시대적 부산물이 우리 속에 이미 침투해 왔으며 성직의 탈선적 조짐이 심각하리 만큼 대두되기 시작한다. 이때에 설교는 살아있는 불씨의 역을 감당해야 하는데 함께 탈선을 한다면 이 땅의 교회는 소망을 잃게 된다. 그러므로 한국강단의 설교가 침몰되기 전에 최소한 이상과 같은 시급한 요소들에 대하여 엄격한 자기진단과 성찰이 있어져야 한다. 그리고 나타난 위기현상들에 대한 시급한 대책이 마련되어져야 할 것이다.

     

    한편, 정장복 총장(한일장신대학교)은 청해진 완도출신이며 고향마을 청산교회의 종지기 소년이었던 그는 신축 건축헌금으로 거액을 헌금하시고 청산교회 건축설계를 건국대교수(경남 외도 건축물 설계자)에게 부탁하여 무료로 설계까지 지원했다.<石泉김용환 발행인, 대표기자>

    새감각 바른언론-청해진농수산신문

    www.chjnews.kr
    입력02010020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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