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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최고 훈장 받은 6.25 전쟁영웅 고마도 뻘수 김기운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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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최고 훈장 받은 6.25 전쟁영웅 고마도 뻘수 김기운씨

미국의 딘소장, 고마도 원조 '뻘수 고 박종민씨

고마도 뻘수 고,김기운[훈]

[

   
▲ 고마도뻘수 고,김기운
청해진농수산경제신문] 고마도 뻘수 김기운[훈]은 전남 완도군 고금면 농상리 출신이면서 군외면 고마도 사람으로 6.25전쟁 당시 중공군 중장을 생포해 화제가 되었다.

그후 고마도 하면 뻘수가 애칭이 되었다 ‘고마도 뻘수’는 6.25 전쟁에 참전했다가 낙오가 되어 용케도 중공군 중장을 붙잡아, 38개월간 중공군의 포로로 지내던 미군 제 24사단장인 ‘윌리엄 딘’ (William F. Dean) 소장과 맞교환을 하게 되어 고마도 뻘수는 전쟁 영웅으로 유명 인사가 되었다.

그는 미국 최고의 훈장인 금성훈장과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무궁화 훈장을 받은 완도인이다. 그래서 완도 뻘수 또는 고금도 뻘수라고도 한다.

한때, 군외면 고마도의 뻘밭에서 바다 일을 하던 평범한 청년에서 고독한 전쟁 영웅이 된 일명 고마도 뻘수 김기운씨는 1992년 62세의 나이에 사망했다.

김씨덕분에 한국전쟁 직후 중공군에게 잡혀 38개월간 포로 생활을 한 당시 전 미24사단장 딘 소장은 김씨가 생포한 중공군 장군과 맞바꾸어 풀려난 일화를 조명해 본다.

김씨 분대가 저녁에 백마 고지로 매복을 나갔다 새벽녘이 되자 지친 김씨는 거기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그사이 분대는 철수를 했다.

얼마후 잠에서깬 김씨는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 혼자 남겨진 것을 알게되어 복귀 하기 위하여 한참 걷던 김씨는 낯익은 벙커를 발견하고 들어 갔지만 중공군 장군의 벙커였다.

놀란 김씨는 벙커안에 있던 수류탄을 발견하여 탈출 하면서 터뜨렸다.
이 때 침대에서 잠을자던 중공군 장군이 잠에서 깨어 탈출을 시도하다가 김씨와 마주치게 되었는데 중공군 장군은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김씨의 머리를 만져보며(당시 북한 병사들은 머리가 짧았음) 적군 병사라는 것을 알고 허리총에서 권총을 뺀 모양이다.

 이에 놀란 김씨는 총구를 막으면 발사가 안되는줄 알고 엄지 손가락으로 총구를 막았으나 권총은 발사되었다는 것. 그때 엄지 손가락이 떨어나간 김씨는 고통속에서도 육박전이 벌어졌고 두 사람이 뒤엉켜 한참 뒹굴면서 산기슭으로 떨어졌다.

아군지역으로 떨어져 기절한 두사람은 아군이 발견하고 중공군 장군은 포로가 되었으며, 김씨는 병원에서 의식을 회복했다. 

얼떨결에 생포한 중공군은 나중에 최고의 장군인 중장으로 밝혀지면서 김씨는 일약 전쟁 영웅이 되었다.

미국의 딘소장

   
▲ 미국 딘소장
이후 포로 교환때 미국의 띤소장과 중공군 중장의 맞교환이 이뤄져 띤소장은 미국측에 인도된후 미국정부는 김씨에게 감사의 표시로 미국의 금성훈장 수여했고, 딘소장 역시 고마움의 표시로 함께 미국으로 가자고 제의했다.

김씨는 자신의 인생이 화려 하게 바뀔수 있는 기회를 포기하고 빨리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당시 군외면 사람들은 "아따 뻘수야 니가 그렇게 높은 사람을 잡았냐" 하며 예나 지금이나 어둔한 장사를 뻘수라고 불렀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와 농사를 지어 지극히 평범하게 살다간 전쟁의 영웅이었다.

윌리엄 F. 딘(William Frishe Dean, 1899년 8월 1일 ~ 1981년 8월 24일)은 과연 어떤 인물 이길래 당시 고마도 뻘수 김기훈의 인생을 바꿀수있는 권력자 이었을까?

그는 미국의 군인으로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 전쟁에 참전하였다.
미군정기 당시 군정청의 군정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군정장관이라 하면 당시는 막강한 실력자 이었다.
그런자가 한국전쟁 참전 중 북한 인민군에 납치되어 평양으로 끌려가 휴전 이후 육군 중장으로 예편 하였다고 하면 우리는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딘 장군은 한국전쟁에서 맨 처음 투입된 미8군 제24사단을 맡았다.

그는 대전 전투에서 전선의 맨 앞에 나아가 3.5 인치 바주카포로 T-34 탱크를 사냥하였다.
사단장 딘 소장은 3.5"로켓포 반을 지휘하면서 최선을 다했으나, 7월 21일 오후 34연대 지휘소에게 철수 명령을 내렸다.

딘 소장은 34연대의 마지막 소대와 함께 50여 대의 차량을 이용하여 시계를 빠져나가고 있었는데, 매복한 북한군에 의하여 공격을 당하여 차량을 버리고 후퇴하였다.

딘 소장이 탄 지프는 길을 잘못 들어서서 본대와 분리되게 되었다. 딘 소장과 함께 있는 병력은 미군의 전선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하였는데, 딘 소장은 함께 가던 부상병에게 물을 떠다 주기 위하여 어둠속에서 물을 찾아 계곡을 내려가다가 낭떠러지로 떨어져 실신하였다.

무주, 진안 근처에서 헤메던 그는 박종구의 도움을 받아 피할 수 있었으며, 36일 후 전라북도 진안군 진안읍 운산리에서 한두규의 밀고로 북한군에 생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딘 소장의 전속부관이 한두규에게 사살되었다.

한두규는 9.28 수복 후 경찰에 체포되어 1954년 9월 23일에 “불법체포죄”로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하였으나 그는 무죄를 주장하였다. 복역 중에 딘 소장이 그의 감형을 탄원하여 1957년 좌익수 전향자로 감형 되어 출소 하였다.  그는 1953년 10월 4일까지 포로로 있다가 풀려났다.

딘 소장이 사로잡힌 대부분의 기간 동안 북한군은 그가 장군인 것을 알지 못하였고, 딘 소장은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계획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문으로 정보를 누출할 것을 두려워하여 자살을 시도하였으나 미수로 그쳤다. 이 과정에서 그는 마침내 계급이 밝혀졌지만, 북한군은 그로부터 첩보를 얻을 수 없었다.

그가 미군정의 군정장관 딘 소장인 것은 안재홍의 증언에 의해 확인되었다. 평양에서 딘 소장의 통역을 맡았던 이규현에 의하면 딘 소장은 정치보위부장 방학세 에게도 심문을 받았다고 한다

딘 장군 구출작전은 딘 장군이 대전에 고립되어 있을때 대한민국의 열차 기관사 김재현 등의 남한의 기관사들은 딘 장군을 구출하려고 시도했다.

기관사 김재현은 본무조사 황남호, 보조조사 현재영 등과 급수용 기관차에 미군 결사대 30명을 탑승시키고 이원역에서 출발하여 대전역으로 향했다.

대전역으로 가는 도중 세천 터널 에서 인민군의 기습을 받아 많은 사상자가 발생하여 작전은 실패하였으며 이때 김재현 기관사는 인민군이 쏜 총에 맞아 숨졌다. 남은 승무원 2명중 1명도 총에 맞아 중경상을 입었다.
그 이후 딘 장군은 중공군 장군과 북한군 총좌인 이학구와 함께 포로교환이 되었다.

고마도 원조 '뻘수 고 박종민씨

   
▲ 원조뻘수-고,박종민씨
6.25전쟁당시 중공군 장교를 생포해 일약 전쟁 영웅이 되어 금의환향한 고마도 뻘수 김기운씨말고 원조‘고마도 뻘수’가 따로 있다고 한다.

'원조 '뻘수는 고금면 봉명리 출신으로 20대 초반 고마도에서 생활하다 25년 전 72세의 나이로 타계한 고 박종민씨라는 것.

박 씨는 고마도 바다에서 김 발을 치며 일을 하다 인근 마을에서 씨름대회가 열렸다는 소문을 들으면 뻘이 묻은 옷을 입은 채 씨름장으로 달려가 냅다 우승까지 했던 씨름장사였다.

그러나 매년 호국의달을 맞이 하면 우리가 찾는 고마도 뻘수는 고마도 원조 뻘수 박종민 장사를 찾는게 아니었다.

세계적인 전쟁영웅 김기운씨를 통해 고마도 뻘수가 미국을 건너 세계적인 인물이 되었던 것이다<서부 정완봉기자>

새감각 바른언론 청해진농수산경제신문 www.chjnews.kr
입력15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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